40주년 5·18 풀어야 할 숙제
김덕모 (호남대학교 교수)

40주년 5·18주간이 끝나가던 지난 28일 국민학교 동창밴드에서 5.18때 행방불명 됐던 친구 임옥환의 소식을 듣게 됐다. 행사 차 5·18민주묘역을 방문했던 동창친구가 묘역을 둘러보던 중 행불자 묘역인 10구역 26묘소에 친구 임옥환이 영으로 안치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막걸리 한잔 올려주고 왔다는 가슴 뭉클한 사연을 접했다.

지난 시절 친구 임옥환의 이야기는 입에 올리기 어려운 금기와 같은 사연이었다. 무슨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친구가 홀연히 우리 곁에 돌아와 줄 것 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 까닭도 있고,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강렬한 염원 탓에 친구의 행방불명과 죽음을 연계시켜 말하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선 금기가 되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실 이상하게도 지난 20일 옥환이의 행방불명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산자부 국장 출신 김모 선배에 따르면 “임옥환이 자신의 모친이 운영하던 하숙집에서 하숙생으로 생활했는데, 공수부대에 의해 첫 발포가 있었던 80년 5월 21일 고향 녹동으로 간다며, 당시 고등학생 3명이 화순 쪽으로 갔으며, 그 당시 화순너리재가 막혀 무등산 쪽으로 우회한 3명 중 두 명은 그날이후 아직까지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세 명 중 한명이 생존하여 후일 증언하기를 한참 무등산을 헤매다 주변이 어두어졌을 때 갑자기 암호를 데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놀라 세 사람이 각자 흩어져 도망치는 가운데 총소리를 들었고 자신만 살아 돌아왔고 두 친구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임옥환 소식을 듣고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찾아간 행불자 묘역 10구역 26묘소에 친구 옥환은 시신 없이 영으로만 모셔져 있었고 우리 친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묘소가 무려 66기나 된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을 어디에다 암매장 했기에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조직적인 암매장 시도나 은폐가 없었다면 이것이 가능할 법한 일인가. 옥환 친구 묘비 옆면에도 옥환친구가 5월 21일 행방불명 됐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묘비 뒷면에는 제자인 임옥환이를 끔찍이 사랑하셨던 중학시절 국어선생님 故 장효문 시인의 절절한 추모시가 새겨져 있었다. 비문에 새겨진 싯귀처럼 친구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친구가 무등의 어느 자락에서 훠이 훠이 깃발이 되어, 천둥 벼락같은 울림으로 우리 곁에 함께해 주기를 기도해 보았다.

1950년 6·25참전 용사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각고의 노력을 하는데, 하물며 80년 5·18 희생자들의 유골을 찾는 일은 체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5·18 희생자들의 한을 풀고 암매장 당한 유골을 수습하는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발포 명령자와 책임자를 찾아내서 처벌하고 사죄를 받아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발포 명령자와 진압 책임자가 특정화 되지 않고 단죄되지 않으면 당시 발포는 계엄군들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한 일로 되기 때문에 당시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에 동원 되었던 사람들의 양심선언에 의해 암매장한 지점이나 관련 내용에 대한 증언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전두환은 故조비오신부 사자명예훼손 재판에서 5·18 당시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기총사격과 관련 당시 공군 소위 중위인 대한민국의 양식 있는 장교가 시민을 향해 기총소사를 했을리가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혹시 이 말은 이들 장교들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시민을 향해 기총 소사를 할 수 없었기에 전일빌딩 건물에 총을 쏜 것은 아닐까.

21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난 후에 광주시민에 대한 발포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천인공노할 만행 하루 전인 20일 전두환이 군의 작전회의를 위해 광주에 왔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과연 전두환은 20일 광주에 왔는가, 오지 않았는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기본적 사실관게부터 규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주전남의 21대 국회의원들이 제1호 법안으로 5·18 관련 특별법을 개정, 5·18의 역사를 왜곡 하거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을 만든다고 한다. 5·18진상조사위원회에 강제조사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시행한다고도 한다. 경찰 수사권에 준하는 조사권 부여는 5·18 진상 규명에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하며, 발포명령자와 책임자를 특정화 해 처벌하고 사죄를 받아내야만 5·18에 빚진 사람들의 양심고백도 기대할 수 있고 행방불명자 등 5·18희생자들도 가족의 품으로 광주의 품으로 귀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40주년 5·18의 숙제는 책임자 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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