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일의 세상읽기-공인의 약속

박준일(남도일보 대기자)
“주민들이 돈을 달라고 했는가? 쌀을 달라고 했는가. 유해독성물질이 반출됐을 때 주민들이 피할 수 있는 시간과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얼마 전 여수국가산업단지 인근 마을 대포지역발전협의회가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다. 이들은 전남도가 1년 전 유해대기오염물질측정망 설치 약속을 해놓고 최근 노력으로 애매모호하게 말 바꾸기를 한데 대한 항의였다. “도지사 물러나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공인의 약속이 내팽개쳐진 데 대한 주민들의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여수산단과 직선거리로 1㎞ 남짓 떨어져 있는 소라면 대포마을은 현재 528세대 1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들에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다.

지난해 3월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국민적 공분을 산 여수산단 대기업들의 배출 측정치 조작사건은 환경 당국 조사 결과 2015년부터 4년 동안 대기오염물질을 터무니없이 축소하거나 실제로 측정하지 않고 허위 성적서를 발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검찰 수사를 통해 여수산단에서 발생한 대기오염물질 측정 조작사건에 연루된 대기업과 측정대행업체 임직원 87명이 재판에 넘겨진 대형 환경사범 사건이다.

김영록 도지사는 지난해 4월 대기오염 측정치 조작 대책회의에서 “여수산단 대기업들의 배출조작 사건 소식을 접하고 도지사로서 큰 충격에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 도민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산단 모든 굴뚝 대기오염도 전수조사를 빠르게 진행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기오염물질 배출 조작사건 1년이 지난 현재 김 지사가 약속한 대기오염물질 배출사업장의 4천 500여 개 굴뚝 가운데 5%도 못 미치는 243개 굴뚝에 대해서만 조사가 진행중이다.

여수산단 민·관 협력 거버넌스 위원회도 최근까지 1년 동안 15차 회의를 가졌지만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4가지 기본 의제에 대해 합의점을 찾고 있는 수준이다. 주민들로부터 1년이 넘도록 ‘회의 중’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곧 그 사람의 품격이다. 공인이나 리더의 약속은 더욱 그렇다. 지위가 높을수록 도덕적, 사회적 책임의 범위는 넓고 엄중하다. 그런데 많은 공인이나 리더는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런저런 약속을 한다. 그리고서는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를 본다. 실망을 넘어 거센 비난을 받게 되는 이유다.

김영록 도지사도 같은 경우다. 여수산단 오염 굴뚝에 대한 전수조사가 애초 실천 가능한지에 대한 검증 없이 갑자기 준비한 대책 발표였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하직원이 써 준 대로 읽었을 뿐이라고 해도 면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리낭독에 불과한 도지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사심 없이 공직을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이다. 공인은 이른 시간 내에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싶겠지만 말 잔치하듯 가볍게 처신해서는 안 된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주민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하고 정중히 사과해야 마땅하다. 힘없는 주민들이라고 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려 한다면 그것은 존경받는 공인의 품격이 아니다. 사과하는 것도 공인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기업들의 오염 굴뚝에 대한 전수조사나 오염물질측정망 설치 약속을 이행하는 것과 별개로 오염치 배출조작 업체에 대한 각종 행정처분에 대해서는 기업들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처분을 미루거나 면책하는 것은 도지사의 결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멀쩡한 회사들도 속수무책으로 부도 위기에 내몰리는 상황이다. 여수산단에 입주한 대기업들도 회사에 따라 매출이 지난 1/4분기와 2/4분기에만 전년도 동기대비 조 단위로 떨어진 회사도 있다. 원칙의 잣대만을 들이댈 수 없는 고민이 있을 수 있다.

도지사의 품격은 전남도의 현재이며 미래가 될 수 있다. 여론조사 기관에서 매월 발표하는 시장·도지사 업무수행 평가 1위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전남도정을 책임지고 있는 엄격한 공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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