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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1)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1)

6부 5장 귀향

“그것은 사실이 아니오.”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대기중인 도천사 승려 능운이 나섰다.

“땡중 새끼가 뭘 안다고 사실이 아니라는 거야?”

“그들이 나라에 반기를 든 것은 사실이나, 김덕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그들이 왜 반기를 들었나를 살펴보시오. 소승이 볼 적에 초근목피로도 힘겨운 백성들을 쥐어짜고, 탄압과 착취와 수탈을 일삼으니 누군들 가만있겠는가. 죽은 나무도 벌떡 일어나서 몽둥이를 들겠소. 그러니 이건 익호장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어라, 역성 들어주네? 중놈의 새끼가 민란의 중심에 서서 역모자 편에 서?”

심문관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산중에서 10년동안 무예를 닦은 능운이 이런 몽둥이 하나에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당장에 십팔기 권법 일격으로 의금부 심문관을 쓰러뜨리고 빼앗은 몽둥이로 그의 대갈박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도망을 쳤다.

“계곡의 내를 건너뛴 것이 잘못되었소이다. 겅중겅중 징검다리를 건너뛰는데 하필 물에 잠긴 돌에 미끄러져 냇물에 빠졌소. 그 돌멩이가 이끼가 끼어있었던 것이오. 심문관과 관군이 달려들어 창으로 능운을 쑤셔박는데 자그마치 스물다섯 방을 먹었소이다. 결국 능운은 몸이 누더기가 되어버렸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인정 스님이 말하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러면 익호 장군은 어떻게 되었소?”

정충신은 그때 서북 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으므로 남쪽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이 상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덕령, 최담령, 홍계남, 곽재우, 고언백 등이 무인(誣引)되었소이다. 그 중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장상(杖傷) 끝에 옥사했습니다. 십일 동안 고문 당할 때의 울부짖음은 호랑이의 포효처럼 온 고을을 울렸습니다. 생사람을 잡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근거없는 무고도 정치행위로 정당화되었지만, 당하는 사람은 실로 억울하고도 천추에 한이 남을 일이었다.

“전에 김덕령은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속(奴屬)을 장살하여 체포된 적이 있었으나 혁혁한 전공을 인정받아 왕명으로 석방되었는데, 이것이 끝내 동티가 되었습니다. 하부에서 보복의 앙심을 품게 되었지요. 자기가 마치 윤근수인 듯 건방을 떠는 노속을 격살하니, 이것이 윤근수 영감 권위에 도전했다 하여 그 심복들이 벼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윤근수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동생이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 판의금부사를 겸했으며,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봉해진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런 집안의 노복을 장살하였으니 윤근수 본인은 모르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 심복들이 명문가대의 권위에 도전했다 하여 김덕령을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김덕령 장수는 임진왜란 시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의병장으로 종군하여 크게 세운 공으로 전주에 들어와있는 광해 세자의 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지요. 그는 선전관이 된 뒤 의병들을 수습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곽재우와 협력하여 왜병 사단을 격파했습니다. 의병을 이끌고 경상 전라 일원에서 왜군을 무찌르던 중 충청도의 이몽학 반란을 제압하라는 명을 받고 북상했습니다. 그런데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했는데 갑자기 이몽학 반군과 내통했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열흘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결국 장독(杖毒:곤장을 몹시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옥사하였소이다. 신경행은 유근 윤근수 최립 등 문신들과 가까운 사이였지요. 신경행은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한 것을 알고 사감을 가졌을 법합니다. 이 무렵 곽재우도 어지간히 모함을 받았지요. 문신들의 세계관은 무인들의 혁혁한 전공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는 투기심 많은 옹졸한 인생들이었지요.”

김덕령은 후에 신원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신원장 하나로 보상받기엔 너무나 억울하고, 나라를 위해서도 두고두고 한이 남는 일이었다.

“차령은 참 한이 많이 깃든 곳입니다. 이몽학 출현 이전에도 차현(車峴)에는 불만을 품고 혁명을 꾼꾼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나고, 산적들도 들끓었으나 이몽학 이후부터 ‘차령 이남 공주강 밖은 배역의 고장’이란 흑색의 말이 더욱 공공연히 또돌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순 엉터리입니다. 패자는 역사의 역적이 되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되도 않게 누명을 씌워서 나라의 재목들과 간성들을 밟아버리는 것이 어떻게 올바른 역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훈요십조에는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강 밖은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라는 조항이 있다고 합니다. 과연 배역의 땅입니까?”

정충신이 묻자 인정 스님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정충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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