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이계홍 역사소설 깃발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3)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3)
6부 5장 귀향

“태조 왕건의 고향은 물론 송악, 즉 개경(개성)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라도 나주의 호족들과 연합해 고려를 세웠습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나주 호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왕건은 궁예 휘하에서 견훤(867~936)을 치기 위해 후백제 땅인 나주에 파견되었지요.”


고려사를 보면, 왕건은 903년(36세 때)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안으로 진출해 염해현(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머물렀다가 견훤의 수군을 무찌르고 수십 척의 배를 노획했다. 여세를 몰아 견훤이 지배하고 있던 나주 이하 10군현을 쟁취했다. 진도와 고이도(목포 앞바다의 섬)를 점령한 뒤, 912년 영산강 하류 덕진포에서 견훤의 군사와 다시 부딪쳤다. 바로 덕진포 해전이다(덕진포의 한자 표기는 고려사에는 德眞浦로, 삼국사기에는 德津浦로 되어 있다. 德眞浦는 무안군 몽탄면 덕암리에 있고, 德津浦는 영암군 덕진에 있다. 두 지역은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혼동할 수 있는데, 왕건과 견훤의 부대 모두 두 지역에 주둔했다. 몽탄 서쪽에 파군교가 있는데 여기에서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육전을 벌였으며, 왕건이 대승했다는 지역 설화가 있다). 덕진포 해전에서도 왕건은 견훤의 배를 부수고, 군사 5백여 급을 베었다. 이때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다.

한편 궁예는 집권 시기 내내 지방 호족과 장수들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등 독재의 길로 치달았다. 이로인해 민심이 이반했다. 왕건도 이때 하마터면 말려들어 죽을 뻔했으나 ‘변함없는 심복’이라는 관심법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덕진포 해전 이후 왕건은 날로 포악한 성격으로 이성을 잃은 궁예로부터 독립했다. 그는 영암의 최지몽, 나주의 오다련 세력의 지원과 함께 서남해안에서 생산되는 해산물과 풍부한 곡식으로 증병해 세를 키웠다. 왕건은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박술희 등과 합세해 궁예를 내쫓고, 고구려의 기상을 잇는다는 목표로 고려를 세웠다.

그러나 궁예 부대의 저항은 극심했다. 궁예를 따르는 차령산맥 동쪽 줄기 미호천-합강의 청주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때 상호 적대와 증오심이 컸다. ‘차현 이남과 공주강외는 배역할 지세이니 이곳 사람을 기용하지 말라”고 한 훈요십조의 8조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차현을 차령산맥으로, 공주강을 금강으로 본다면 이는 금강 유역이다. 애써 넓게 보자면 오늘날 전라도 땅도 차현 이남일 것이다. 물론 경상도 땅의 반 이상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강외’ 라는 뜻은 광범위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 유역을 말한다.

왕건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주 호족과 전라도인의 절대적 자원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런 전라도를 부정하는 유훈을 남겼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조작되었거나 잘못 해석되었다고 보여진다. 훈요십조를 태조 왕건에게서 직접 전해받았다는 사람도 전라도 출신 박술희다. 이처럼 고려 왕조 내내 전라도 출신이 주류 세력을 형성하고, 차별받은 흔적이 없는데 배역의 땅이라고 하니 특정인에 의한 조작설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차현’은 차령산맥이 아니라 충청도 아산과 공주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이고, 공주강은 수백 리 흐르는 금강이 아니라 공주 어귀를 흐르는 강을 의미하오이다. 왕건이 특정 지역을 차별하도록 유언을 남긴 것은 사실이나, 그 대상을 전라도라고 특정할 이유가 없고, 굳이 말한다면 궁예를 따르는 청주인과 싸운 공주강외 지역, 즉 미호천-합강 지역이라는 것이지요. 그 지역 일대의 호족들이 왕건 즉위 후 반발하여 후백제에 투항하고, 이들을 주도한 이흔암, 환선길, 진선 등이 모두 그 지역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반역을 꾀했으므로 왕건으로서는 ‘반역의 고장’으로 볼 만했습니다. 궁예를 따르는 그들은 왕건 암살조까지 조직했으니 경계할 수밖에요. 그래서 그곳은 높은 벼슬도 하지 못한 배척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삼스럽게 들리는군요. 나는 별 생각없이 지내왔습니다, 그려.”

“그럴 것입니다. 훈요십조는 어렵게 이룬 왕업이 혹시라도 반역으로 물거품이 될까 노심초사했던 늙은 왕이 후대에게 노파심에서 남긴 당부의 말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개연성이 있습니다. 고향에 가시더라도 이 점 유념하십시오. 거듭 말씀드리지만, 왕건은 집권 초기 나주오씨를 왕후로 맞았고, 나주 호족들은 그와 왕권과 신권을 함께 한 주류세력이었습니다. 왕사 도선국사가 건국 철학을 만들고, 2대 왕 역시 나주오씨 소생의 무왕(혜종)으로 건국철학을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고려는 이렇게 전라도의 혼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런 왕건이 훈요십조라 하여 전라도를 폄하하는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한마디로 역사 모독이지요. 패자가 역사의 역적이 되는 것이지,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배역자가 됩니까.”(‘왕건-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왕조의 창업주’, 함규진, 장선환편 인용).

“그렇군요. 우리 역사를 새롭게 알았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지곡의 사패지로 나가보실까요? 소승이 보아둔 명당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명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