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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6)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6)

6부 5장 귀향

서산군수 이민수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으나 정충신은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 아들 빙이 잠을 자는 중에 꿈에 상감의 용안을 보았노라고 했다. 용안이 훤한 상감이 아버지 정충신을 한없이 인자하게 내려다보더라는 것이다.

“아버님, 집터 하나 잡아놓으시지요. 아무래도 길몽 같습니다. 집 짓는 일은 나중 생각하시더라도 집터를 하나 골라놓기로 하지요.”

“너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라.”

기왕에 길몽을 꾸었다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충신은 빙을 지곡에 남겨두고 길을 떠났다. 망일사에 머문 지 사십 여일만이었다. 그러나 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노복(奴僕)이 병이 들어 남하마저 더뎠다.

우중중한 날씨 때문일까, 7월 18일 창덕궁 인정전에 벼락이 떨어져 지붕 한쪽이 떨어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산 피해보다는 그로 인한 민심 이반이 더큰 걱정이었다. 궁궐에 벼락이 떨어졌다면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며, 필시 흉악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주기적으로 호란이 닥치거나, 왜란이 닥치고, 외적(外敵)의 침략이 없으면 조정에서 정파끼리 서로 피를 부르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그것은 실로 전쟁보다 더 참혹한 결말을 가져왔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는 힘든 백성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한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중의 일부는 도적으로 변해 산적 무리가 되어 고을의 집들을 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지체높은 집은 사병(私兵)을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이삼 백명씩 두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는 관군들은 적고, 주인 나리들을 지키는 사병들이 기세등등해있으니 나라가 온전할 리 없었다.

인정전의 벼락이야 억수로 퍼붓는 빗속에서 먹구름들이 서로 부딪치고 갈라치면서 뇌성과 번개를 치는 자연의 조화였지만, 민심이 사나우니 필연코 난리를 겪으리라는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대부분 공포스럽고, 나라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 국운이 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만큼 궁궐에 떨어진 벼락은 백성들에게 살아가는 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정충신이 막상 전라도 땅으로 접어드니 거짓말같이 장마가 걷혔다. 함열 곰나루에 이르러 비로소 말에게 싱싱한 풀을 먹였다. 그동안 본의아니게 젖은 풀만 먹던 말은 물똥만 픽픽 싸서 기진맥진한지라 타고 가는 것보다 업고 가는 형국이었는데, 모처럼 깨끗한 마른 풀을 먹으니 히히힝 소리 지르면서 뒷발로 지축을 박차고 앞발을 하늘로 차올리며 스스로 힘을 뽐내고 있었다.

8월 5일 김제에 이르러 옛 벗 기옹 정홍명을 찾는데 하필이면 문관 시험 시관(試官)으로 한양에 차출되어 올라가 집에 없었다. 정홍명은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고생하며 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품과 문장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강직한 아버지에 비해 성격이 유해서 정충신이 벗으로써 가까이 했다. 같은 정씨는 아니지만 그는 친형처럼 정충신을 따랐다. 그를 만나면 시국 상황은 물론 천지의 변화도 서로 재볼 수 있었는데 만나지 못하게 되니 아쉬웠다. 만경강의 지류를 건너는데 개울물이 넘쳐 건너기가 곤란했다. 간신히 내를 건너자 이번에는 다리가 무너져서 행장을 등에 메거나 머리에 이고 물을 건넜다. 그리고 갈재를 넘어 담양에 도착했다. 종자가 달려오더니 보고했다.

“나리, 면왕정이 가까이 있고, 송여인, 송여의 집도 가깝습니다.”

송여인과 송여의는 면앙정 송순의 후손들이고, 정충신과도 교유가 있었던 사이였다.

“그러면 그 마을로 가자.”

송순은 너무 권력 가까이 가면 살이 데고, 멀리하면 추워서 얼어붙는다는 대표적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이조참판 재직 시 죄인의 자제를 기용했다는 이기 일파의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었는데, 얼마후에는 권세를 잡은 김안로의 모함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김안로가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뒤 복권되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 경상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50세 때 윤원형과 황헌의 모함으로 그는 다시 쫓겨났다. 명종대에 복권되어 대사헌,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다시 복권되어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명종 17년)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었다.

선조 2년에는 한성판윤으로 승진하고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관직생활 50여 년 만에 은퇴하여 고향에 세운 면앙정에서 시와 가야금을 뜯었다.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풍류를 아는 재상이었으나, 무엇보다 넘어지면 일어서는 부도옹(不倒翁), 불사조라는 끈질긴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쓰러지면 일어나고, 또 쓰러지면 일어나곤 하는 그 자세는 어디서 오는 줄 아는가”

정충신이 따르는 부관에게 물었다.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명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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