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7)
6부 5장 귀향

“저야 장군 나리를 모시는 것뿐, 뭘 알겠습니까. 다만 이 점만은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쓰러지면 일어서곤 하는 그 힘은 오래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오래 살기만 하면 물을 먹고 유배를 갔다가도 다른 정파가 일어서면 복권이 되고, 그 정파가 숙청이 되면 또 쫓겨났다가 다른 세력이 또 기존의 정파를 조져버리면 다시 복권이 되는 수순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자는 장수자입니다. 죽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면앙정 선생을 통해서 여실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독특한 시선이었다. 정충신은 정파를 초월한 유유자적이라고 말하려고 하였으나, 젊은 군관은 엉뚱한 데서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말도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만, 면앙정은 강호생활을 하면서 고고했으니 어떤 누구도 범접을 못했지. 그래서 난세가 수습되면 그를 중용하는 것이지. 면앙정은 홀로 고고히 있을 때도 시가의 큰 산맥을 형성했으니 그 기백과 선비정신이 남다른 것이었어. 그 후손 송여인과 송여의도 이름없이 살지만 시퍼런 기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초야에 묻혀있지만 경세가시란 말씀이군요. 그런 사람들을 조정에 데려다 써야 하는데...”

정충신이 유심히 군관을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깊은 젊은 군교였다.

“나리, 인걸들을 데려다 써야하는 것이 조정의 의무 아닙니까. 그런데 끼리끼리 지들끼리 자리를 주고받고, 세습까지 하니 인재가 발탁되기 어렵지요.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느냐.”

“소관이야 장군 나리를 잘 압니다. 늘 개혁의 마음을 두고 사시니 오늘을 괴로워하고 계신 것이지요. 젊은이들에게 생각을 하고 살라는 말씀에 우리 젊은 군교들은 마음 속으로 장군 나리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실력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으면 입을 닫고 살렸다. 어느 칼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

군관이 알겠다는 듯 목을 한번 늘어뜨리더니 잽싸게 마을로 들어갔다. 송여인의 사랑채에 자리를 잡자 주안상이 나왔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모두가 거나해졌다. 송여인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부상들이 전하는 말이, 호족이 다시 곧 쳐들어온다고 하는디, 조정은 한가한 개비지요?”

그는 흡사 광야의 사자처럼 고고해보였다.

그런 유언비어는 항용 돌았다. 그러나 궁궐은 만성이 되어버렸다. 어디 한두 번 당하는 일이냐는 듯이 태평했다. 무능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어보였다.

“나가 이것저것 서책을 보는디, 아무래도 삼사년 내에 나라가 뒤집어질 모냥이오. 그란디 상감은 중국으로부터 온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꽃에 환장해부렀다고 하더만요. 우리는 온갖 재물을 갖다 바치는디 돌아오는 것은 고작 금사낙양홍이란 말이오. 그 금시낙양홍을 짓뭉개버리고 싶소. 그 꽃을 가져온 놈이 특진에 승급을 했다 하니 더욱 미치고 환장할 일이요. 지금 시국이 그럴 때낸 말이요. 광해 임금을 쫓아냈지만 그의 반에 반이라도 했으면 좋겄구만이요.”

“지금 취했소?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시오.”

정충신이 따졌으나 그는 광야의 사자답게 주저없이 말했다.

“그럼 장수 나리는 시방 암시랑도 안하단 말이요?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 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재조지은을 못잊겠다고 고개를 수구리는디 얻은 것이 금사낙양홍이오.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는 것이 하찮은 꽃이고, 굴종 이외 얻은 것이 무엇이오? 소인은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해가 훨씬 당당한 군왕이라고 믿습니다. 장수들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를 결정하라(觀形向背)고 지시한 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외교냔 말이오. 한디 반정세력에게 제거되고, 관형향배 외교는 묻히고 말았고만이오. 사대외교가 대세가 되고, 고거이 나라 운영의 중심이 되었으니 헛물이 돼부렀당개요. 물정도 모르고 남의 다리 긁다가 졸지에 망국이 되어버릴 수요.”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절망적이오?”

“도대체 장군 나리 암시랑도 안허요? 후금과의 관계 유지를 강조하다가 당해부렀는디도 모르겄소?”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실력이 없거나 실천력이 없으면 그것은 만용에 지나지 않는다.

“소인이 보건대, 명,청 교체기라는 엄청난 변혁기를 현재의 임금과 신하들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왜란과 호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이 명,청 교체기가 기회이자 위기인디 요걸 살피지 못하고 있단 말이요. 관성과 타성에 젖어서 기득권에만 안주하고 있단 말이요. 명나라의 몰락은 동자(童子)도 아는디, 대신들만 모릅니다. 명에 기대 이익을 취한 집단이니 그럴 것이요만, 반다시 청산되어야 하는 집단이요. 백성 위에 군림하고 호령하며 반칙, 특권, 탈법 불법을 자행하면서 온갖 이익만 취해왔으니 나라의 기둥뿌리가 썩어문드러지건, 나자빠지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개자식들이요. 명나라에 닥치고 충성! 하면 다 끝나는 일잉개 그럴 것이요만 부숴버려야 할텐디 고거이 아닝개 나가 답답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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