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를 빛낸 의인들
(15)독립훈장 신설
새마을훈장 있는데 독립훈장 없는 대한민국
장재성·송홍·최상현·이기홍 등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수백여명

친일 흠결 이유 서훈심사 비대상
독립유공자에 친일행위 ‘주홍글씨’
상훈법 고쳐 ‘독립훈장’ 만들어야

7월 6일 오전 11시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서 장재성 선생 서거 70주년 추모제가 열린 가운데 장휘국 광주시교육감과 유족 등이 학생탑에 참배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인 성진회와 독서회를 이끈 장재성은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으로 총 7년의 옥고를 치렀다./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나는 요즈음 대한민국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선 선열들의 피나는 희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건립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상훈법에는 독립유공자를 예우하는 ‘독립훈장’이 없다. 새마을훈장도 있는데 독립훈장은 없다.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전국의 340여 학교에서 5만 4천여 명이 참여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그야말로 ‘제2의 3·1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역이 성진회와 독서회였고, 성진회와 독서회를 만든 이가 장재성 선생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사건이 일어났다기보다 일으킨 분이 나의 오빠 장재성이다”는 여동생 장매성의 회고는 사태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고교 시절 기념탑에 새긴 비문을 보면서도 정작 기념탑의 주인이 장재성이라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장재성 선생은 이 일로 4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여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일본 경찰은 또 장재성을 투옥하였다. 일제 강점기 장재성 선생은 도합 7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우리는 장재성 선생이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랐다. 1950년 장재성 선생은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에 수감 중인 장재성을 총살하였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 청춘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분에게 대한민국이 준 것은 독립유공의 서훈이 아니라 총살이었다. 그것도 불법 총살이었다.

부끄러웠다. 남 보기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러고도 ‘의향 광주’라고 떠들어 온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이러고도 ‘광주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자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청와대의 높으신 분에게 따지고도 싶었으나, 나부터가 부끄러워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과 장재성 선생 서거 70주년 추모제 현수막.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인 성진회와 독서회를 이끈 장재성은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으로 총 7년의 옥고를 치렀다./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5월 27일 ‘장재성 기념사업회’를 창립하면서 우리는 72인의 서훈 요청서를 제출하였다.

한 달 후 국가보훈처로부터 답신이 왔다. 그런데 72인 중 29인에 대해선 ‘심사를 할 수 없다’(심사비대상)는 답변이 왔다. 참담하였다. 장재성 선생을 비롯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 홍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물질적 지주였던 최상현 선생이 모두 심사비대상이라는 것이다. 어쩌자는 것이냐?

정해두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면서기를 했는데, 이 일이 친일 흠결에 해당하여 서훈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기홍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퇴학을 당했고, 이후 농민운동을 하다가 4년의 옥고를 치렀다. 일경은 1941년 독립투사들을 감시하려고 대화숙을 만들었는데, 이 대화숙에 들어간 것이 친일행위라는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목에 훈장을 달아드리지는 못할망정 ‘친일행위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으니 “이것도 나라인가?” 유족들의 피맺힌 한을 어찌할까?

건국한 지 72년의 세월이 지났다. 단 한 명의 독립투사가 아직까지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대한민국은 직무유기의 범죄를 범한 것이다. 만일 백 명의 독립투사가 독립유공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잘못된 법 때문이라면 그 법은 폐기되어야 할 악법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수백 명이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항일 투사의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72년 동안 서훈을 받은 이는 고작 1만 5천명이다.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7월 6일 오전 11시 유족들과 함께 기념탑 앞에서 헌화를 하였다. 하늘도 슬펐을까? 추모제를 올리는데 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독립훈장을 신설하자. 1945년 8월 15일 이전 독립운동의 공적만으로 서훈 여부를 판결하자. 이것만이 민족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첩경이다./장재성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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