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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38)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38)

6부 6장 포도대장, 깃발 펄럭이며

해가 바뀌어 1635년 정월 초삼일이다. 아침에 병영의 뜰에서 신년하례식과 시무식을 갖고, 왜란 시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병사들 제를 올리고, 향교에 나아가 알성예(謁聖禮:임금이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제사지내는 행사)를 연거푸 치르다가 병이 들었다.

한 겨울인지라 호흡기가 극도로 나빠져 기침을 하면 멎지 않고, 가래를 한 움큼씩 쏟아냈다. 의원은 진맥을 해보고 담한병이라 하여 가래가 발끝까지 찼다고 고개를 내둘렀다. 마음이 급해지자 정충신은 스승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 간행을 서둘렀다. 나라로부터 지급되는 녹봉을 문집 발간에 쏟았다. 아버지 산소에 석물을 세우는 일도 급해졌다. 대를 무시하고 9대조 정지 장군 묘 바로 밑에 아버지 묘를 세워서 대소간에 말이 많아 그동안 석물을 세우지 못했는데, 기왕에 들어선 묘를 옮기지 못할 바에는 석물을 세워 자식된 도리를 하고 싶었다.

궂은 일은 비정하게 연거푸 온다고 했던가. 손자 선이 마마병에 걸리고, 외손녀가 장질부사에 걸려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며느리 편지에 따르면, 식구들이 끼니를 굶고 앉아 날을 보낸다고 했다. 모든 병의 근원은 영양실조에 있으니, 정충신은 가계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자신의 탓인 양 가슴이 아팠다. 늘 청빈을 강조해온 터라, 궁핍을 휴대품처럼 달고 다니는데 그것이 처자를 편하게 하지 못했으니 회한만이 자리잡았다. 그는 아들 빙에게 편지를 썼다.

-너의 처의 글을 받아보니 식구들이 연일 끼니를 굶고 있다니 아비의 마음이 아프구나. 나라의 국록을 먹는 장신(將臣)으로서 가솔들의 호구지책마저 해결해주지 못하니 안타깝다. 무명 세 필을 보내니 배고파 보채는 아기부터 구완하거라. 이곳 실정 역시 병영에 비축된 양식이 없는 데다, 스승 백사 공의 문집을 발간하느라 나라에서 주는 급료를 다 써버렸으니 십분 어려움이 있다. 한 자의 필목(무명으로 된 광목)이라도 사사롭게 사용하는 것은 나라의 재정을 손실시키는 죄악이니 단 한 자인들 사용할 수 있겠느냐. 식구들이 굶고 있는데도 구원하지 못한 아비의 모양이 초라하다. 근면만이 해결책이니, 채마밭에 채소 한포기라도 가꾸어라.

편지를 보낸 얼마후 정충신은 다시 쓰러졌다. 크고 작은 심리적 압박으로 병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근원을 따지자면 모든 것이 조정의 배신이었다. 공무에 실책을 한 것도 아니고, 당파의 일원도 아닌데 정파적 이해로 진주 병영까지 쫓겨와버린 것이다. 그를 천리 밖으로 쫓아낸 것은 최명길 세력을 분산시키는 데 있었다. 나라의 꼴을 보니 남쪽 왜구보다 북쪽 오랑캐의 침략이 눈에 훤히 보였다. 후금에 대한 대응이 적대감과 증오심으로 일관하니 주류 사대부가 침략을 유인하는 꼴이었다.

“사대만이 살 길인 양 날뛰는 물정 모르는 것들...”

병중에도 그는 안타까워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럴 때마다 각혈을 했다. 병영에 국가지원은 없고, 결국 민폐를 끼치라는 것인데, 정충신의 청렴성으로는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다시 쓰러져 피를 한웅큼씩 뱉어내는 가운데, 판관 박돈복을 불러 경상병사를 사퇴하고 요양하겠다는 상소문을 쓰게 하여 군관 홍경직으로 하여금 한양에 전달하도록 명했다. 병도 병이지만 나라 돌아가는 꼴이 천리 밖 한촌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1635년 한 여름이 되어서야 경상병사직을 면직한다는 왕의 윤허가 떨어졌다. 병영 인근의 품관(품계를 가진 벼슬아치의 총칭)의 집에 머물러 요양하고 있을 때,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오는 일행이 있었다. 임금이 보낸 어의(御醫) 박훈 일행이었다. 의대를 갖추지 못하고 발을 질질 끌며 북을 향해 절하고 어의 일행을 맞았다.

정충신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가을의 끝물 때였다. 기울어져가는 반송방(오늘의 서대문구 냉천동)의 집에 도착해보니 독에 쌀 한바가지가 없었다.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 있었다. 세상도 크게 변해있었다. 양반 찌끄러기들은 참봉직을 사고 파는 일에 눈이 뻘겋고, 갓전 주인은 갓(벼슬의 상징)으로 재미를 붙이고, 베전 행수는 북포(北布:함경도에서 나던 올이 가늘고 고운 삼베) 장사에 어깨춤을 들썩이고, 장안의 남녀는 인산(因山:국상) 구경에 정신이 빠져들었다. 그때 마침 왕비 인열왕후가 왕자를 출산했으나 난산으로 대군이 죽고, 중전도 산후증으로 죽었다. 마흔두 살의 노산(老産) 때문이었다. 섣달의 일이고, 그것이 다가오는 병자년의 국난을 암시하는 예후와도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병자년 새해가 밝자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양화진 물에 큰 고래가 들어와 죽고, 일식이 생겨 대낮인데도 천지가 깜깜했으며, 경기도 안산 앞바다에서는 바위 세 개가 갑자기 솟아났으며, 경상도 고성에서는 큰 바위들이 저절로 굴러다니고, 서해바닷가에서는 오리떼가 때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이런 이변을 보고 장안에 유언비어가 돌더니 다시 왜구의 변이 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정충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놈들아, 왜구가 아니라 북쪽 오랑캐다. 어서 지천(최명길)을 불러라!”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명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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