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50.최종회)

제6부 7장 병자호란 전야

뒤이어 이시백의 제문이 답지했는데, 그의 제문은 남달랐다.

-사람들은 우리를 형님과 아우같다고 했지요. 내 마음에 뼈와 살로 알고 서로를 의지하며 나라의 어려운 일을 함께 했지요. 임진년 나라의 운수가 비색(否塞:운수가 꽉 막힘)하여 왜구가 팔도를 밟았을 때, 공은 한미한 시골 출신으로 겨우 16세의 어린 나이로 (광주목사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이천오백 리 길을 달렸소. 왜적을 피하느라 밤에는 걷고 낮에는 자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를 그 몇날이었나. 의주 피난 조정에 보고할 때, 선왕(선조)께서 공의 발이 피투성이의 짚신을 바라보고 감격해셨소. 그대는 국토를 회복하여 어가를 따라 한양에 돌아왔소. 사람마다 정 공을 일러 마땅히 중하게 발탁되리라 믿었는데, 안되었지요. 그런데도 표정 하나 구김없이 도원수 휘하에서 종군하니 장만 공은 내 살처럼 여기셨소. 그후 수많은 기치창검(旗幟槍劍:군대에서 쓰던 기·창·검의 총칭) 선봉장으로 나라를 지켰으나 앞으로가 문제인즉, 공이 없는 세상이 두렵구려. 덮쳐오는 먹장구름을 어느 누가 거둬낸단 말인가...

후에 효종의 장인이 된 능천군 구인후는 다음과 같이 제문을 올렸다.

-나는 정공과 같은 처지에 있는 몸으로 일찍부터 분수와 의리가 있어 같이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했고, 정공과 서로 혼인을 맺은 사돈간이라 양가 인연의 끈이 쇠줄처럼 단단했다. 세상이 평탄하거나 험난하거나 평생을 함께 가기로 약속된 오직 한마음 뿐이었지. 그런데 어찌 꿈엔들 생각하였겠소. 공께서 병을 얻어 먼저 갈 줄이야. 내 지난날 관사에서 서로 만나 밤새도록 대화가 이어지고, 고이 간직된 병서와 병략을 알려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구려. 그때 막힘없이 전해준 정 공의 병략은 나라 유지의 근간이 되었소. 그러므로 누구보다 더 많이 살아서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호족 무리의 위협 앞에 있으니 정 공의 부재가 너무도 두렵소이다.

구인후는 충청병마절도사로 해미읍성에서 복무하고 있을 때, 당진 유배중인 정충신을 거의 날마다 찾았다. 이때 구인후는 자신의 조카를 정충신의 딸과 혼인시켰다.

한편 대문장가 계곡 장유의 만시는 이랬다.

-체구는 작아도 온 몸에서 빛이 난 그대

옛날 오랑캐 땅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 지방 사람들보다 지리를 더 잘 알았지

날뛰는 오랑캐 어느 때 섬멸할까  

병조판서와 총융사를 지낸 광산김씨 김만기가 지은 ‘국조인물고’에서 그는 정충신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공은 담론이 차례가 있고 막힘이 없어 얘기를 듣는 자들이 피곤한 줄 몰랐다. 도성 서쪽 반송방(오늘의 서대문구 냉천동)의 집에 살고 있을 때 어가(御駕)가 서교(西郊)에 거동하게 되면 반드시 마당에 나가 엎드렸다. 집에서의 생활은 매우 가난하여 때로는 남에게 빌리는 경우도 면하지 못하였고, 장복(章服:오위에 딸린 장졸들의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관대)이 아니면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제사상 아니면 밥상에 고기를 올리지 않았다. 여러 공신들이 앞다투어 역적 집안의 전토(田土)를 몰수하여 나누기를 청하였으나 정 공만은 그 말을 하지 않았는데, 장공(張公:장만 도원수)이 공을 위해 청하여 비로소 집을 하사받게 되었소. 그 집이 옹색하고 비좁았으나 종신토록 한 칸도 늘리지 않았소. 이웃집에 맛좋은 배나무가 있었는데, 가지가 담장을 넘어 열매가 공의 집에 떨어졌어도 도로 담장 너머로 던져주었소.

정충신은 최명길과 함께 붕당정치의 최대 피해자였다. 윤집, 오달제 등의 척화파 신하들에게 오랑캐와 내통하는 간신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정충신은 이괄의 난 일등공신,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묘정(임금을 모시는 사당)에 배향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숙종이 인조 묘정에 배향하려고 했으나, 주류 세력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노론 정국 속에서 높이 평가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은 할아버지의 묘지명을 남구만에게 부탁하면서 ‘의리’라는 글자를 받고자 했으나 남구만은 그 두 자를 끝내 써주지 않았다. 주류 세력의 눈썰미는 비문 한자에도 사납게 박혀있었다. 이 통에 노선을 함께 한 장만, 최명길, 정충신이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정충신이 세상을 떠난 뒤 조선 사회는 더욱더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이념사회로 변질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충신이 충무공 시호를, 최명길이 문충공 시호를 받은 것은 정충신 사후 49년만인 1685년(숙종 10년)의 일이다. 기존 제도의 틀 안에서 조금이라도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노력이 평가받는 길이 이렇게도 멀고 험난했다.

어느해인가, 정충신의 묘소에 웬 낯선 장정이 찾아와 엎드려 절하고 사라졌다. 길삼봉의 아들이었다. 그후 이런 부류들이 묘소를 찾아 소리없이 참배하고 사라지는 풍조가 생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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