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성 행주기씨(幸州奇氏) 금강공파 금강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시대의 역경 이겨낸 대학자·충의지사 집안

고려 문하평장사 기순우 중시조 1세…세종이 발탁한 기건, 중흥시켜
기대승·기정진 조선 성리학 대가…기삼연 등 22명 공훈자 배출
가통 이을 인재 양성한 보산재…장성남문창의·호남창의회맹 주역들

종가 백석헌 전경

노령산맥 축령산 줄기의 전남 장성 황룡 아곡리에는 백석헌이라는 행주기씨(幸州奇氏) 금강공파 금강종가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현재 규모는 작지만 옛 명성은 어느 가문에도 뒤지지 않는다. 입구엔 홍길동테마파크가 들어섰지만 청백리 박수량의 청백당유적을 지나면 고개정상까지 1만평이 아치실, 또는 하남으로 불리는 금강종가의 옛터다. 노사집, 송사집 등 문집과 4천여 점 고문서를 보존해 학문과 충절에 빛나는 인물들의 족적을 입증하고 있다. 장성 행주기씨 금강종가를 찾아 가문 내력을 살펴 본다.

◇기자의 후손, 3천년 뿌리 깊은 가문

기씨의 유래는 3천여년 전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역사로서 고증되기 어려운 시기가 존재하지만 뿌리 깊은 가문의 전통과 자부심은 고매하다. 고대중국의 은나라 종친 자서여는 기자라고 불리는데 주무왕이 패권을 잡자 일행 5천명과 동쪽으로 이주해 기원전 1123년 기자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41대 왕조가 9백여년 이어지다가 준왕이 위만에 밀려 마한 한왕이 되었고 8대를 잇고 다시 백제에 망하면서 유민이 경기도 고양의 행주(당시 덕양)로 옮겨 행주가 기씨의 본향이 된다.

행주기씨는 고려 인종 때 문하평장사를 지낸 기순우를 중시조 1세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2세 기수전 역시 문화평장사를 역임하면서 원명 교체기까지 고려 명문세족으로 자리잡았다. 고려말 신돈의 화를 입은 7세 기현의 증손자 기건(1390~1460)이 가문을 중흥시켜 명문의 기반을 다졌다. 10세 기건은 세종에 발탁되어 호조참판에 오르고, 단종조 대사헌을 지냈으나 세조가 즉위하자 은거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기원·기진 형제, 기묘사화 피해 남도 입향

10세 기건의 손자인 12세 홍문관 응교 기찬의 다섯 아들이 기형, 기원, 기괄, 기진, 기준이다. 장남 기형이 사마양시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5섯째 기준은 홍문관 정자와 시강관을 역임하고 기묘사화에 조광조와 함께 화를 입은 기묘명현 중 한사람이다. 둘째 기원과 넷째 기진이 기묘사화의 화를 피해 남도의 장성 일원으로 내려와 장성문중과 광주문중을 이루며 호남에서 학문과 충절의 가통을 이었다.

13세 기원의 손자 15세 기효간(1530~1593)이 장성 보룡산 아래 아치실에 금강종가를 열었다. 기효간은 하서 김인후의 제자로 김천일, 변이중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한 은덕군자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남문창의를 주도하여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공신에 오른 충의지사이며 효행으로 그가 시묘 살았던 제청이 있던 산이 제청산, 마을 이름도 제청이 되었다. 그 동생 기효근(1542~1597)은 해남현령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의 사천대첩에서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에 적을 만나 자결한 충절로서 이순신, 권율 등과 함께 선무공신에 올랐다.

◇기대승 조카 기효간 금강종가 열어

13세 기진의 둘째아들 기대승(1527~1572)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으며, 1559년부터 8년에 걸쳐 이황의 이기이원론, 주리설에 맞서 주정설과 주기설을 주장하여 유학사상에 영향을 준 사단칠정 논변으로 유명하다.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1550~)은 김덕령과 함께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 1천명과 군량 3천을 모아 왜군을 물리쳤으며 국왕이 있는 행재소까지 시위해 군기시첨정에 올랐다.

24세 기정진(1798~1879, 호는 노사)은 10살 이전에 성리철학을 깨우치고 경서를 통독한 인재였으나 양친을 여읜 후 금강종가의 학당에서 공부하고 사마시에 급제했다. 평안도도사, 공조참판 등의 여러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았고, 임술의책, 병인소 등의 상소문을 통해 위정척사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황, 이이 이후 300년 지속된 주리·주기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 이론 체계를 수립,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로 불린다. 우기, 이통설, 납량사의, 외필 등 성리학사상 저술을 남겼고, 고산서원에 배향됐다.

◇기삼연·기우만 의병장 등 22명 공훈

25세 기삼연(1851~1908, 호는 성재)은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26세 기우만과 을미사변에 의병을 소집하기로 맹세하고 금강종가의 뒷산에 있는 석수승암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에 추대됐다. 고창, 영광, 부안, 정읍 등지에서 연승한 의병부대는 1907년 겨울에 추월산 금성산성에 들었으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붙잡혀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당했으며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됐다. 기정진의 손자 26세 기우만(1846~1916, 호는 송사)은 광주 광산관을 본영으로 하는 의병을 이끌었으며, 투옥과 거사 실패 후에는 일제를 거부해 은둔했다. 송사집을 남겼으며 고산서원에 배향됐으며,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됐다. 27세 기산도(1878~1928) 역시 을사오적인 이택근을 암살하려고 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그의 장인이 의병장 고광순이다.

금강종가의 종택 터는 매화 향기 만발한 1만평 골짜기 전체였고,애초에는 인재였다가 망정와, 하남정사, 백석헌 등으로 당호가 바뀌었다. 사랑채 백석헌 말고도 보산재, 동재, 서재를 비롯한 학당이 따로 세 동이나 있었던 종택이 기씨 집안 가학의 산실이었다고 기호철 박사는 전한다. 사화와 조선 후기 전염병, 일제의 보복에도 지켜왔던 종가는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종가는 조선시대 공신과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만 22명 배출한 구국의 가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제청재 제각
사랑채였던 백석헌 위치에 외삼문과 함께 문간채를 신설했다.
금강종택 백석헌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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