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 타도·민주화운동 원동력

광주YMCA, 시민과 함께 걸어 온 100년
① 광주YMCA와 광주3·1만세 운동
일제 탄압·민주주의 쟁취 시민항쟁, 독재정권 타도·민주화운동 원동력
사회개발·문화교육 프로그램 보급

제주노회창립기념사진 1930년. /오방 최흥종기념관 제공

광주YMCA는 기독인 사회운동단체로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 설립돼 광주와 100년의 역사를 함께해 왔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늘 함께 하며 광주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이끌며 동참했다.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시기에는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시민운동의 리더와 활동가들을 육성·배출하는 역할도 했다. 남도일보는 이번 기획물을 통해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는 광주YMCA가 민주화와 지역 발전을 위해 공헌한 자세한 내용과 인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광주YMCA 창립
1900년대 초 광주는 수백 호에 불과한 초가들과 호남선에서 광주로 오는 기차 선로도, 전등도 없고 인구도 많지 않은 농촌이었다. 1904년 미국남장로교의 유진벨 선교사에 의해 광주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광주교회와 기독교학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제중병원이 세워지면서 기독교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광주가 전라도 지역의 중심부로 자리 잡고 철도역이 건설됐다. 인구가 증가하며 도시화가 되고 상공업, 서비스 산업도 발전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 무렵 3·1 독립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민족독립에 대한 좌절로 우리 민족은 망국의 한을 품게 됐고, 가난과 울분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은 점점 늘어났다.

광주의 기독청년들과 민족주의 청년들은 주권을 빼앗기고 힘을 잃고 방황하는 가난한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민족독립의 꿈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1920년 7월 29일 오원기념각에 모여 광주YMCA 창립을 알렸다.

당시 민족·사회운동 지도자인 오방 최흥종 목사를 비롯한 30여 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모였다. 김강, 장맹섭, 서창균, 강태성, 서한권, 장남구, 최순호, 김태오, 최영욱, 황상호, 최영균, 김철주 등이 중심이 됐다. 초대회장에는 숭일학교 교사였던 20대 청년 최병준, 총무에는 지역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철이 담당했다.

창립 이후 광주YMCA 회원들은 광주의 정신·문화·경제·사회의 발전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원 대부분은 이미 3·1운동에 적극 가담해 일제로부터 곤욕을 치렀었다. 최흥종 목사는 서울에서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고, 2대 회장인 황상호 장로는 3·1운동 때 ‘조선독립 광주신문’이라는 지하신문을 황송우라는 가명으로 발간했다. 초대회장 최병준과 초대총무 김철을 비롯한 회원들 역시 민족운동에 참여해 감시와 고초를 겪었다.

1924년 광주YMCA는 최흥종 목사를 3대 회장으로 추대하고 최영균이 총무가 돼 연합회의 인준을 받고 처음으로 광주YMCA 간판을 북문밖 교회의 유치원에 달았다.

먼저 4중 목적사업으로 덕육부(德育部)와 지육부(知育部), 체육부(體育部)와 친교부를 만들었다. 덕육부는 하령회와 종교집회, 하기아동학교 등을 주관하고, 지육부는 강연, 야학, 유치원, 교육사업을, 체육부는 축구, 야구, 권투, 유도부, YMCA 소년척후대를 운영했다.

1925년 10월에는 피폐한 농촌을 살리기 위한 연합회 농촌사업을 시작했다. 농촌 8개 지역에 농민 강습소를 설립해 개량농사법을 가르치고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 위생, 질병예방 교육을 했다. 1933년에는 백운동 고든 어비슨 선교사의 집에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광주Y 농업실습학교를 세웠다.
 

1950년대 광주Y 임원들(김천배, 이영생, 백영흠, 임종철 등).

◇일제 탄압·민주주의 시민 항쟁

일본은 1930년대에 이르러 각 지역에 신사를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37년 7월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해 10월 2일 한국 민족에게 소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모든 학교와 사회단체, 교회집회에까지 강요했다.

광주YMCA도 일제의 탄압으로 수난기를 겪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광주YMCA 지도자들은 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이에 광주YMCA는 1938년부터 활동을 대부분 중단, 1944년 12월 자진 폐회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독교와 YMCA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됐고 1938년 여름, 조선중앙YMCA만 형식적으로 명맥이 유지됐을 뿐 전국 모든YMCA는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일제의 핍박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광주YMCA 회원들도 8·15해방과 동시에 YMCA 재건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 말, 변질된 YMCA를 외면했던 문천식, 김윤식, 김학준, 정인보, 최상옥, 김현승, 조철환, 이동혁, 신성철 등이 재건준비모임을 가진 후 1945년 9월 중순에 금동 금정교회 유치원에서 재건 총회를 열고 이사회를 구성해 회장에 최흥종 목사, 총무에 정인세를 선출했다. 회관도 못 찾고 회원도 흩어진 상태였지만 그 시대에 필요한 선교, 교육, 농업 등 가능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회원들과 사회의 필요에 부응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으로 인해 광주YMCA는 부회장 주형옥을 비롯해 강요한, 김후근 등은 옥고를 치렀다. 최영욱 회장과 박석현 이사와 본회 종교부 순회 강사였던 조용택 전도사가 총살당했고 학생부 위원 최상현이 행방불명 됐다.

휴전 이후 광주YMCA는 목적사업과 회원 조직, 회관 신축, 사회발전 기여 등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대학Y 조직 확대, Hi-Y 클럽, 성인클럽조직, 와이즈멘클럽 발족 등으로 회원운동체로서 외형도 확대하고 에큐메니컬 활동, 학생 하령회, 웍캠프, 의료봉사활동, 장학금 지급, 문화 체육활동, 직장인 초청 간담회, 체육활동 등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60년대부터 회원모집이 활성화되면서 성인클럽이 조직되고 와이즈멘 활동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리더스클럽, 레크리에이션 강습회 새로운 문화를 보급하는 장소가 됐다.

1970년대 광주YMCA는 ‘기독교 운동체로서의 Y’, ‘행동하는 Y’를 이끌어가기 위한 운동의 원동력인 회원들의 조직 및 의식 향상, 실천 활동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1970년대 들어 영구 군사독재를 시도하기 위한 유신체제는 본격적으로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과 민주사회 구현을 위해 활동하던 단체들과 긴장과 충돌이 빚어졌다. 군사독재정권은 정권연장의 야욕을 드러내며 국민 자유를 최악으로 통제하며 억압하고 탄압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YMCA는 시민논단, 성서연구, 신학 강좌, 십대의 광장, 광천동 사회개발과 같은 이념 교육과 청년클럽 활성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개설 등으로 시민의 참여를 확대했다. 또 도시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회 문제들에 대한 토론과 해결 방안 협의 등 시민과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들로 운동의 지평을 확장했다. 여러 활동의 결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시민들의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원동력이 됐다.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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