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특별기고-1597년 9월 16일, 울돌목

구종천
구종천(광주광역시 일자리정책관)

정유년(1597) 9월 16일 울돌목 앞바다. 이순신은 판옥선 13척을 이끌고 결전의 바다 명량(鳴梁)으로 향했다.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곧바로 우리가 진을 치고 있는 울돌목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미 남해안 전역에 뻗쳐놓은 촉수와 같은 첩보망으로 이순신은 일본 수군에 대한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

왜의 수군은 모두 300여 척. 총대장은 지난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도도 다카도라였다. 그는 조선의 수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이순신 마저 없애고 얼마 남지 않은 수군을 완전히 섬멸한 다음 해로를 통해 곧장 한양으로 올라갈 심산이었다.

일본 수군 300여 척이 밀려오자 이순신은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리며 선두에 나선다. 그러나 나머지 장수들은 일본 수군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 앞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고 대장선 홀로 적의 수군과 맞서게 된다. 겁에 질려있는 장수들에게 초요기를 세우고, 군령을 내리며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라며 독려했다.

그제야 울돌목 전체가 조선 수군의 결사항전장으로 전환되었고, 지자와 현자총통을 마구 퍼붓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며 적선을 부수다 때마침 적장 마다시의 목을 베어 대장선에 매달자 기세가 크게 꺾인 일본 수군은 물러났다.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 함대는 적선 30여 척을 침몰시키고 수천 명을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바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13척의 신화 ‘명량대첩’이다.

이순신은 그해 1월 12일에 재침한 정유재란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소 온 백성의 신망이 높던 장군에 대한 당파적 이해관계와 질투심에 불타던 선조의 콤플렉스 발동으로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 모진 문초와 심한 옥고를 치르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백의종군 중이었다.

7월 15일 칠천량 패전으로 원균이 죽고 수군이 전멸되다시피 하자 다급했던 선조는 곧바로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 장군이 교지를 받은 날은 8월 3일 구례에서 였다. 불과 한 달 보름여 만에 궤멸한 조선의 수군을 재건하여 명량대첩이라는 신화를 이뤄낸 것이다.

임진란 이후 옥포, 당항포, 부산포, 한산도 해전 등에서 연전연승하던 조선의 막강 수군의 모습이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지금 바람 앞에 놓인 조선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다시 최전선으로 나가라는 선조 이연의 교지를 받아든 이순신,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을까!

그래도 이순신은 선조에게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열두 척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전선은 비록 적으나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것입니다.” 장계를 올리고 기꺼이 전선으로 나갔다.

2020년 9월 16일. 우리 광주도 코로나19의 습격으로 불길이 쉽게 잦아들지 않으며 지역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이제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물론 중견기업 마저도 공포와 한숨 소리가 메아리쳐 오고 있다. 시민 모두가 한 곳만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이 절체 절명한 위기의 순간에 지역민의 생명과 재산,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市長과 당국자들이 코로나 전선의 최일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 신화! 그의 곁에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빈 충직한 장수들과 수많은 격군과 수군 그리고 이들을 지원해 온 이름 없는 민초들의 혼연일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423년 전 오늘 이순신 장군이 이뤄낸 명량대첩의 교훈을 기억하며, 온 시민이 한마음으로 힘과 지혜를 모아 시당국을 믿고 따라 작금에 처한 코로나 위기를 하루빨리 극복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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