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농촌운동 기틀 만들다

광주YMCA, 시민과 함께 걸어 온 100년 ③ 광주YMCA와 농업실습학교
광주·전남 농촌운동 기틀 만들다
농촌계몽운동으로 독립기반 마련, 쌀농법 개선 보급·농민 야학 교육
실습교육 통해 농촌 지도자 배출

어비슨농업학교 학생들과 어비슨 부부. /광주YMCA 제공

1920년대 농촌사회는 일제의 지주제를 매개로 한 수탈적 농업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자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급증, 농가 부채의 증가, 농업의 영세구조 심화 등 갈수록 피폐해졌다.

특히 일본이 쌀을 대량 수탈해 농민들이 빚 때문에 땅을 빼앗기고 소작인으로 전락되는 생사의 기로에 선 상황이었다.

1925년부터 한국YMCA 운동은 공업화된 도시 중심의 서구식 사업보다 한국 실정에 맞춰 대다수 국민들이 관련된 농촌사업에 주력하기로 했다.

1925년 YMCA의 농촌사업을 필두로 농민교육, 농민협동조합, 농촌지도자 양성을 중심으로 물산장려, 대중 각성운동 등을 통해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민족경제자립운동의 취지였다.

YMCA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농촌운동의 전개를 통해 YMCA는 전국 19개 도시에 농민학교를 세웠으며, 전국에 330여개의 농촌사업소, 그리고 전국에 730여개의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연합회’는 도시Y, 학생Y, 농촌Y로 구성됐으며 중앙YMCA를 비롯한 대도시Y는 지도력을, 25개의 학생Y는 인력과 지도이념을, 미국YMCA 국제위원회는 기술과 재정을 제공하면서 농촌운동에 공헌을 했다.

광주YMCA는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촌사업을 시작했다. 전남 일대 8곳의 농촌센터를 설치했고, 이 센터를 본거지로 협동조합운동을 했다. 광주 근처의 우산리, 신안리, 소태리 등 7개 농촌에 농민강습소를 설립했다.

농민교육 내용으로는 국문과 간단한 수학을 가르치고, 농민 모임을 조직해 부업과 농사 개량 교육, 물품구매와 판매의 효과적 방법을 교육해 농촌생활을 개선하고 농민의 수입을 증대시키도록 지원했다. 또 농촌사업연구회를 교회 목사, 선교사와 함께 조직하여 조선농촌에 관련된 문제와 이론을 배우고 연구했다.

광주군의 용강촌, 순천군의 수평리 등에는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야학을 세웠다. 농한기 겨울에 도시 학생들이 농촌에 가서 농민 대상 야학반을 운영했다. 전남 각지의 농촌 야학수는 53곳이었다.

어비슨과 농업실습학교 소년들이 트럭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광주YMCA 제공

YMCA 농촌사업의 하나인 협동조합운동은 신용조합, 판매조합, 소비조합 등의 기능을 했다. 보통 40가정이 모여서 하나의 협동조합을 만들고 적립금이 300원이 되면 조합원들에게 싼 이자로 영농비, 비료값을 빌려줬다. 높은 이자 때문에 쌓이는 빚에 찌드는 농민들에게 1부의 싼 이자로 빌려주는 일을 했다. 협동조합을 통한 농산물의 판매는 농민들이 생산물을 제값에 팔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광주Y는 광주군 신촌리, 월산리, 칠주리, 동계리 등지에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 지방 협동조합을 통해 영농법 개량운동, 농민운동이 이뤄졌다. 해남, 화순, 보성, 장흥, 영암 등 지방민들은 최영균, 어비슨 등을 강사로 초청해 지도를 받았다.

1920년대 말 농민강습회도 사전에 일일이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야학과 같은 계몽사업도 경찰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1930년 6월에 부임해 온 우가끼 총독이 벌인 소위 ‘농촌진흥과 자력갱생’이라는 농촌운동으로 YMCA의 농촌사업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총독부 당국이 한국농촌사업으로 만들었다. YMCA농촌사업을 말살하자는 속셈을 드러냈다. 1934년부터는 YMCA 국제원조가 세계적인 불경기로 60%나 감소돼 7명의 외국인 농업전문가도 2명으로 줄어들면서 농촌사업은 중단됐다.

전국 5개부로 나누어 실시한 한국YMCA의 농촌사업이 현저한 성공을 거둔 곳은 광주, 서울, 함흥 세 곳이었다. 특히 광주는 다른 지방보다 더 월등하게 성과를 거뒀다. 광주Y의 농촌사업을 돕기 위해 온 어비슨(G.W.Avison) 협동 총무는 1933년 수피아여학교 앞에 있던 자신의 집에 광주Y 농업실습학교( Farmers Practise School)를 세워 농촌지도원을 양성했다.

광주농업실습학교는 1933년에 2년제 학교로 약 20여 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다. 이듬해 19명의 농촌지도자를 배출했다. 농업실습학교의 교사로는 최득은, 정인세, 홍석은, 김흥태와 박형렬이 있었다. 교육내용은 소채, 완두, 농산가공, 수도였고 일반교과는 성경, 부기였다. 어비슨은 쌀농법 개선 보급, 농민 야학, 신협운동, 사회체육활동 지원 등을 통해 광주, 전남지역의 농촌 계몽과 농업 혁명 운동을 일으켰다. 어비슨농업학교 교육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땅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삼애(三愛)정신’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YMCA의 농촌사업이 협동조합운동과 농업실습학교를 통한 농촌지도자 양성으로 틀이 잡혀가자 일제는 탄압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계속 지도자를 배출했으나 일제의 무서운 눈초리로 입학 지원생이 줄어들자 결국 1938년에 폐교하게 됐다.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