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野說天下
<제2화> 명필 이삼만 (14)순수한 예술혼
그림/정경도(한국화가)

그림/정경도(한국화가)

글씨를 써줄 것을 정중히 간청하는 중국인에게 자신의 글씨가 별것 아니라고 겸손하게 거절하는 이삼만을 한동안 바라보던 중국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어찌 글씨에 산골이 있고, 농사꾼이 따로 있을 수 있겠소. 사양하지마시고 비단에 글씨 한 점만 써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중국인은 준비 해온 필묵에 새하얀 비단을 이삼만 앞에 펼치는 것이었다. 같은 조선인도 아니고 바다 건너 중국인이 자신의 글씨를 알아보고 글씨를 받고자 한다니 이삼만은 한편으로 당황했고 또 기쁘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예의를 갖춰 말하는 그 중국인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삼만은 이윽고 아름다운 중국 비단에 글씨를 쓱쓱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글씨가 완성되자 한참동안 유심히 그 글씨를 들여다보던 중국인이 말했다.

“으음! 참으로 글씨는 명필이나 자획 속에 사기(邪氣)가 끼었으니 애석하도다!”

글씨는 명필이나 글씨에 사기가 끼었다니? 그 중국인의 한마디가 이삼만의 머리를 사납게 내리쳤다. 중국인은 글씨를 써준 이삼만에게 많은 돈을 주고 감사하다며 후히 사례하고 돌아갔다.

뜻밖의 일을 당한 이삼만은 어안이 벙벙했다.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진 것에 대한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비단에 쓴 자신의 글씨를 보고 평(評)을 하던 그 중국인의 말이 묵직한 뼈다귀처럼 가슴에 박혀 얹힌 듯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글씨에 사기(邪氣)가 끼었다니 그 무슨 말인가?’

이삼만은 처음으로 자신의 글씨를 알아봐준 중국인의 그 말을 음미하고 또 음미하면서 결국 자신이 중국인의 뜻하지 않는 부탁을 받고 화려한 비단에 처음으로 글씨를 쓰면서 달뜬 마음에 기교와 잔꾀를 잔뜩 부려 운필(運筆)을 했던 것을 생각 했다.

‘으음........, 글씨는 곧 내 마음이었구나!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중국인은 내 글씨를 보고 내 마음의 허와 실을 모조리 꿰뚫어 보았던 것이야!’

이삼만은 순간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그 후로 이삼만은 정신 수양에 더욱 힘을 썼고 필을 쥐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글씨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논두렁 풀이나 베고 흙이나 파먹고 사는 농투성이 이삼만이 일약 필객으로 이름을 세상에 날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이 낯선 중국인의 방문 때문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온 약재 상인은 서예가로서 일평생 서예에 몰두 해온 예인(藝人)이었고 우연히 조선에 와서 이삼만의 필체를 물목기로 접하게 되어 그 필체의 어떤 경지를 발견해 세상에 들어내 놓게 했던 것이다. 이삼만에게는 그 중국인이 최고의 은인이자 최초의 스승이 된 셈이었다.

더구나 글씨에 사기가 끼어 애석하다는 그 한마디는 이삼만이 자기 멋대로 공부를 하며 글씨를 그냥 써온 그에게 글씨라는 것이 무엇인지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던 커다란 울림으로 가슴을 때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 순간부터 이삼만은 필객으로서 갖추어야할 모든 조건과 정신적 수양과 고뇌가 한꺼번에 물밀듯 몰아닥쳤을 것이고 또 자신의 글씨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었다. 벼루 열개를 구멍 내 버리고 붓 천 자루를 닳아 버렸다고 하니 이삼만의 피나는 노력이 얼마 만큼이었는가를 쉽게 짐작하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에게 하잘 것 없는 그 글씨의 아름다움과 그 글씨 속에 배인 정신까지 발견하여 그의 앞길을 밝혀 준 그 중국인은 참으로 사특함이 없는 순수한 예술혼의 경지를 더듬는 소유자였음이 분명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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