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염원 외치다

광주YMCA, 시민과 함께 걸어온 100년 ⑤ 엄혹한 시절 광주의 사랑방 ‘오방실’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염원 외치다
⑤ 엄혹한 시절 광주의 사랑방 ‘오방실’
사회정의·인간의 존엄성 확대 활동
민주주의 쟁취 위한 시민 항쟁 논의
박재봉 목사 ‘행동하는 Y’ 이끌어

‘오방실’에 모인 광주YMCA 관계자들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광주YMCA 제공
광주YMCA 9·11·13대 회장을 역임한 백영흠 회장과 7·10·17대 총무인 김천배 총무가 오방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광주YMCA 제공
백범 김구 선생이 오방 최흥종 선생의 헌신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한 ‘화광동진(和光同塵)’ 편액. /광주YMCA 제공
박재봉 목사

오방 최흥종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광주YMCA 금남로 본관에는 오방실이 마련됐다. 최흥종의 아호인 ‘오방’은 다섯 가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해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의미로 그는 5가지 신조를 평생 지키며 살았다.

광주 YMCA 오방실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오방 최흥종 선생의 헌신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쓴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영친필이 편액돼 있다.

오방실은 엄혹했던 시절, 광주를 걱정하는 사회인사들의 사랑방이자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염원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초 금남로 1가로 옮긴 광주YMCA 회관은 도청과 광주경찰서가 불과 200여 미터 인근에 있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4·19 당시 경찰과 학생 데모대가 YMCA 회관 앞에서 격돌하며 진퇴를 거듭했다. 쫓기는 학생들은 YMCA 안으로 물밀듯 몰려왔으나 YMCA회관 내에서는 한 사람도 체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YMCA의 책임이었다.

이들 중에는 학생Y 회원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총과 곤봉에 맞고 끌려가는 학생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야간 강습소에 다니면서 낮에는 일하는 근로 면학 소년들의 참가도 많았다.

학생 의거 이후 회원들은 선한 일에 대한 열정이 더욱 강해지면서 집단활동과 봉사, 토론, 강좌에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 들어 영구 군사독재를 시도하기 위한 유신체제는 본격적으로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과 민주사회 구현을 위해 활동하던 단체들과 긴장과 충돌이 빚어졌다.

각 대학에 위수령을 내리고 군사독재 중단을 외치는 대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투옥했고, 군사독재정권은 정권연장의 야욕을 드러내며 국민 자유를 최악으로 통제하며 억압하고 탄압했다.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의식있는 시민들은 민주사회를 열망하며 지식인의 사회책임, 의식화, 인권,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통제하에서 대학Y 운동은 자유롭지 못했다. 군사정권의 유신선포로 대학가는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와 학생 구속 등으로 안정될 날이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심화됐다.

광주YMCA는 시민논단, 성서연구, 신학 강좌, 십대의 광장, 광천동 사회개발과 같은 이념 교육과 청년클럽 활성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개설 등으로 시민의 참여를 확대해 나갔다. 도시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회 문제들에 대한 토론과 해결 방안 협의 등 시민과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는 더 많아지면서 운동의 지평을 확장했다.

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근본을 구축하기 위해 각 분야의 인간존엄성 확대, 사회 정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강구했다. 70년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빈부격차, 불평등 심화 해소를 위한 사회개발, 민주시민의식 향상, 민족문화 운동, 인권,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기독교계와 광주YMCA의 노력은 교육과 집회, 기도회 등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 연행과 투옥 등 유지지도자들의 수난이 이어졌다.

이러한 70년대의 여러 활동의 결과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보여준 광주시민의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위한 구체적 활동에 원동력이 됐다.

1970년대 초 실무책임자로서는 김천배 총무가 재직하고 있던 중 박재봉 목사가 1970년 부총무로 부임해 실무 역할을 보강했다. 김천배 총무가 1971년 3월 18일 은퇴하자 박재봉 부총무가 총무로 취임, 1976년까지 봉직했다.

박재봉 목사는 1970년대 광주YMCA를 ‘기독교 운동체로서의 Y’, ‘행동하는 Y’로 이끌어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회원들의 조직 및 의식 향상, 실천 활동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시민논단이 끝난 뒤에는 시민들이 학습공동체의 장을 열어 광주YMCA 오방실에 모여 ‘공동체 이론과 실제’를 학습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 자기반성을 통해 사회 속의 비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개발 혜택에서 제외된 서민층의 복리 향상, 전 시민 동참의 민주주의적 사회 건설로 목적을 확립시켰다. 시민의식 개발과, 지역사회 조직화, 민중, 민주화 사업도 중점적으로 진행하게 됐다.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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