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호 전남도 건설교통국장의 남도일보 특별기고
독천장
전동호(전남도 건설교통국장)

달력 끝자리가 4일과 9일이면 서는 장(場)이다. 영암의 서쪽 학산, 미암, 서호, 삼호에서 저마다 수확한 농수산물을 들고 나왔다. 목포, 강진, 완도, 진도, 해남의 특산물과 각종 생필품까지 국도 2호선을 타고 모여들며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운주리, 짱뚱어, 농어, 숭어가 철따라 좌판에 올라왔고 맛이 있어 ‘맛’이라 했다는 조개가 한바구니 가득, 두 눈을 내민 뻘떡기도 망에서 꿈틀거렸다. 낙지는 항상 있었다. 미암 샛바다의 물이 나면 누구나 건져냈고 문수포에 모였다가 장날마다 나왔다.

독천은 오백여년 전 ‘쇠장이 서야 마을이 평화로울 것이다.’고한 노승의 비기대로 ‘송아지 犢, 내 川’자를 쓴다. 그 뜻대로 열린 우시장은 전국 최고의 새끼소가 거래되는 곳이 됐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이들을 돌볼 시가지가 조성됐다. 식당에선 생새우, 바지락, 굴, 밴댕이, 칠게, 황시리, 토하가 젓갈이 됐고 해물과 육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갈낙탕’은 그렇게 탄생했다. 천하일미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1982년 12월 영산강 하구언이 막히기 전까진 그랬다.

내 어릴 적 ‘십 리 발길 산모롱이 돌아가면 사방팔방 달려오는 이 길 저 길들...’ 전석홍 시인의 ‘독천장 가는 길’은 늘 가고 싶은 곳이었다. 스물 살 땐 한 마리에 100원하던 세발낙지 5접을 놓고 친구들과 윷판을 벌이기도 했다. 희미한 추억이 되었다. 장마저 쇠락한 이유인가? 특화거리 조성과 시장현대화에도 오가는 사람이 줄어드니 별 차도가 없다. 무슨 대책이 필요하다.

지금 5일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시작했다. 그전엔 10일장이었다. 7년 전쟁의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이 모이는 공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옛 제나라 관중이 유곽을 늘리고 오늘날 북한이 장마당을 곳곳에 연 이유도 같다. 함평한우와 비빔밥, 장흥 토요시장이 명물이 된 것도 사람이 모이는 우시장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럼 독천장에도 다시 쉽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생산을 넘어 경매, 가공, 판매까지 가는 전천후 축산특화단지를 생각해 볼 때다.

독천장은 학산면 소재지와 미암면 채지리가 공존한다. 망월천의 물길을 바꾸면서 행정구역은 그대로 놔둔 것이다. 그렇지만 경계는 없다. 여전히 사방에서 붕어, 가물치 외에 해산물까지 들어온다. 같은 바다였던 무안과 신안에서 이젠 찻길로 온다. 2023년이면 철길도 난다. 남해안고속전철이 서창 뜰로 지나며 은곡리에 영암역이 들어서면 부산까지 두 시간대 대량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하는 현실에도 그대로인 역사와 문화가 있다. 십리근방에 백제 왕인박사, 신라 도선국사, 고려 별박사 낭주최씨 지몽, 조선 ‘묏버들… 홍랑’의 연인 고죽 해주최씨 경창의 고향이고 개성사람 석봉 한호가 공부했던 죽림정사와 어머니가 떡을 썰던 아시내개, 선사주거지와 지석묘, 상대포와 백암, 남해신사, 암각매향비 등이 모여 있다. 또한 장쟁이산이 고산의 산중신곡 ‘월출산이 높더니마는 매운 것이 안개로다.’와 일상을 같이한다.

독천장은 영암 5일장 중에서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앞바다는 간척지 육해가 되었지만 미암낙지 간판을 단 손이 큰 아짐, ‘친정엘 가려면 비포장 길을 하루는 탔다.’며 50여년 전주식당을 누룽지 인심까지 푸짐하게 한 전주댁 누님 그리고 신선한 갈비를 제공하는 이지정육점도 여전하다. 긴 시간을 타고 호산회관은 목포에서, 독천식당은 광주에서 같은 이름으로, 또 다른 곳에서 이곳 장맛을 전하고 있기도 한다.

앞으로 독천장은 특별해져야 한다. 주변 산야와 문화체험 후에 ‘갈낙탕과 젓갈이 있는 백반 한 상’에 미암사람 하춘화의 ‘영암아리랑’을 흥얼거리게 하고, 흑석산 기운이 충만해오는 맑은 물에서 갈대와 풀꽃을 헤치며 아이들이 놀 수 있게끔 하면 된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 아니한가? 장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영명식당, 남창상회, 제일고무신, 독천예식장이 되살아 날을 기대해본다. 후회 없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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