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를 빛낸 의인들 (17)임동규
고구려 정신으로 민족 자존 회복에 앞장
박정희 시대 반독재 투쟁 전개
남민전 지도적 인사로 활동
투옥중 ‘무예도보통지’ 연구
출옥 후 ‘경당’ 조직 무예 보급

박정희 시대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7여 년간 투옥된 임동규는 출소후 ‘경당’을 만들어 민족 무예를 보급하는 것을 생의 마지막 사명으로 알고 살아갔다.

임동규가 연행된 것은 1979년 3월 13일이었다. 악명 높은 남영동 분실의 취조실은 지금까지 경험해 본 그 어떤 곳보다 철저하게 설계된 곳이었다. 일주일간 잠을 재우지 않는 릴레이 수사가 진행되었다.

임동규는 1964년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도예종의 은신을 도와주었는데, 나이 25세의 임동규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모진 매를 맞았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나왔다. 매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1979년 40세의 임동규는 남민전의 지도적 인사였다. 매와 몸의 싸움은 차라리 견디기 쉬웠다. 조직의 전모를 파괴해 들어오고자 집요하게 추적하는 저들의 수사기획과 조직의 핵심을 보위해야 하는, 지능이 대결하는 싸움을 벌였다. 임동규는 자신이 통혁당 당원이라며 거짓 자백하면서까지 남민전의 지도부를 보호하였다.

1979년 9월 YH 여성 노동자들이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야당 총재 김영삼 씨가 이 투쟁에 동참하였고, 김경숙 씨가 진압 과정에서 떨어져 죽었다.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었다. 부산과 마산에서 민중은 항거하였다. 이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의 머리통을 쏘았다.

남민전의 정식 명칭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이다. 살벌했다.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선봉에 서서 싸우던 나에게조차도 남민전은 과격한 결사로 느껴졌으니 하물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중앙정보부의 보도를 시청하는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떨었겠는가?

임동규 선생이 만든 24반 무예협회 제자들. 가운데 붉은 옷 입은 분이 임동규.

1979년 7월 17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던 1천여 명의 학생, 재야인사들이 다 석방되었으나 임동규는 석방되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으나 임동규는 석방되지 않았다.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쌍무기형을 선고받고, 임동규는 옥중의 0.9평 방에 유폐되었다.

임동규는 왜 남민전을 선택하였나?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독재자의 손이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여 오면서, 임동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지성인이라면 뭔가 적극적인 실천을 조직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초조감을 누를 수 없었다. 임동규는 선배 박현채에게 “한국에서 도시게릴라가 가능할까요?”라 물었고, 박현채는 “안 돼, 다 죽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제 치하에서 총을 들고 싸운 의열단이 있었다면, 박정희 유신체제와 무장투쟁을 기도한 조직이 남민전이었다. 시인 김남주도 남민전의 전사였다. 광주서중과 경기고를 졸업한 박석률도 박정희 독재의 혁명적 전복을 꿈꾸었던 남민전 전사였다.

1979년 10월 27일 구치소에서 난데없는 조가가 울려 퍼졌다. 임동규는 교도소 소내 방송을 통해 박정희의 시해사실을 알게 되었다. 1981년 1월 23일 지리한 공판이 끝나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별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영어의 몸이 된 것이 조금은 억울하였다. 무한대의 인내를 요구하는 무기 징역형이 시작됐다.

임동규는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 때 집대성한 동양무예의 총화이다. 그런데 1907년 군대해산과 더불어 실전되어 버린 책이다.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새벽은 느닷없이 오는 것인가, 감옥에서 뼈를 묻을 것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에게 석방 조치가 떨어졌다. 1988년 12월 21일이었다. 출옥 후 임동규는 ‘경당’을 만들어 민족 무예를 보급하는 것을 생의 마지막 사명으로 알고 살아갔다.

2020년은 광주서중·일고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무등의 빛’이라는 이름의 책자를 발간하였는데, 이 책은 16인의 독립운동가와 17인의 민주운동가, 도합 33인의 삶을 다루었다. 모두가 젊음을 나라에 바친 의로운 분들, 취조 과정에서 당한 고문으로 병사하신 분들이었다. 지난 9월 20일 영면하신 임동규 선생의 영전에 삼가‘무등의 빛’을 올린다. /장재성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황광우

*경당
삼국시재 고구려 때에 각 지방에 세운 사학 기관으로 평민층의 미혼 남자를 모아 경학과 문학, 무예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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