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노래 ‘고엽’과 이브 몽땅

신일섭(어썸오케스트라&콰이어 대표)
 

요즘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겨울의 문턱에서 마지막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이브 몽땅(Yves Montand)의 ‘고엽(Fallen leaves)’을 들어본다. 음악 ‘고엽’은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가을이면 가장 다시 듣고 싶어하는 노래다. 프랑스 샹송의 멋과 맛이 그대로 드러난 음악이다. 이브 몽땅의 노래도 좋지만 그의 젊은 날 연인이었던 당대 최고의 가수 에디트 삐아프(Edith Piaf)가 불렀던 ‘고엽’은 듣는 이의 가슴 속을 더욱 깊이 파고든다.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 사상가였던 볼테르(Voltaire)가 “프랑스인처럼 아름다운 샹송을 가진 국민은 없다”라고 했던 말에 적극 동감하고 싶다.

~~~/낙엽이?무수히?나뒹굴어 /추억과?미련도?마찬가지로 /그리고?북풍은?낙엽들을?실어나르는군요 /망각의?싸늘한?밤에 /보세요,?난?잊어버리지?않았어요 /그대가?내게?들려주었던?그?노래를 /~~~ (‘고엽’ 노래 일부분)

이브 몽땅은 영화계 데뷔 1년만인 1946년 출연한 영화 <밤의 문>의 주제곡 ‘고엽’을 불러 샹송계에서 놀랄만한 이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곡은 볼테르가 자랑했던 프랑스의 아름다운 샹송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불후의 명곡으로 꼽힌다. 사랑의 추억을 더듬으며 이별의 슬픔을 차분히 그려낸 가슴 아프도록 아름다운 샹송 ‘고엽’.

프랑스 국민배우이자 가수로 프랑스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았던 이브 몽땅(1921~1991)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출신으로 유태계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뭇솔리니의 파시스트 체제를 피해 이브 몽땅이 2살 때 쯤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이주했다. 변변한 학력도 없었던 이브 몽땅은 어린 시절 마르세이유 밀가루 빵 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고 조선소에서 힘든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연예계에 진출하면서 성공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유태계 이주민으로서 프랑스 지성사회와 문화예술계, 정치계 등에서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활동했던 그의 독특한 이력과 배경을 주목하고 싶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신념으로 죽을 때까지 좌파 사회주의 성향을 가졌던 그는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1950년대 직접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68년 소련의 “프라하의 봄” 침공사태로 실망해 탈당했지만 동시에 반전 평화주의자로 프랑스 문화계는 물론 대통령 후보로 나서라고 할 만큼 정치계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민중 사랑에 대한 신념과 순수한 열정은 그의 생명력이자 존재감이었다.

또한 문화적 자부심과 지성을 존중하고 동경하는 프랑스 사회에서 정규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했지만 자기들의 문화 속에 녹아든 낯선 이방인을 주류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프랑스인의 관용력(똘레랑스)을 엿볼 수 있다. 여러 분야에서 아직도 학벌과 파벌, 연고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프랑스인의 똘레랑스는 좋은 귀감이 되리라 생각한다.

1991년 11월 장 자끄 베네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던 이브 몽땅은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119 구급차에 실려가면서 구급대원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여한이 없다. 삶에서 할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을 전부 해보았다. 재능 또한 아낌없이 소진했다”라고.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어느 누구라도 후회없이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을까.

당시 프랑스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이브 몽땅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우리 시대의 위대한 목소리와 배우로서 뛰어난 재능이 사라졌다”며 애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모든 정규 방송 프로그램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중단되고 그가 출연했던 영화와 그가 부른 샹송 ‘고엽’을 방송했다고 한다. 그는 가고 없지만 목소리는 남아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든다. 낙엽과 진한 커피향 속에 그의 음악은 더욱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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