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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장흥고씨(長興高氏) 의열공파 고만거종가 / 무계고택

장흥 장흥고씨(長興高氏) 의열공파 고만거종가 / 무계고택 <39>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조상의 얼 간직한 ‘정원의 품격’

고경명 3부자 …충의 효열 표상
한말의병·독립운동으로 계승
조경미 높아 명승으로 대중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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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거종가 안채

편백나무 울창한 전남 장흥에 수목과 정원을 아름답게 가꿔 온 충의 효열 가문, 장흥고씨 의열공파 고만거종가가 있다. 고려 명족이었던 장흥고씨 집안에서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군을 이끌고 금산성, 진주성에서 순절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 의병장은 가문의 명예이자 아픈 역사다. 국토 참절에도 목숨바쳐 호남을 지킨 의로운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며 이웃과 더불어 아름다운 고장 가꾸기에 앞장선 고만거종가의 내력을 살펴본다.

◇ 중시조 고중연 , 공민왕 지킨 장흥백

고씨는 제주도 탐라국을 세운 ‘고을나’의 후손이고, 제주고씨는 탐라국 왕자였던 고말로를 중시조로 모신다. 고말로의 10세손 고중연(다른 이름 고복림)은 고려 때 홍건적의 침략을 피해 도성을 떠난 공민왕을 호위해 군기감사, 장흥백에 봉해져 장흥고씨의 중시조가 된다.

고중연의 아들 고합(?~?)은 벼슬하여 상서에 오르고, 손자 고백안은 보승중랑장을 지내고 전남 영광으로 입향했다. 고백안의 아들이며 중시조 4세손인 고협(다른이름 고신부)은 고려말 이방원과 동문수학했으나 고려 왕실 인척가로서 충효 가통을 지켜 은거했다. 그는 이방원이 ‘신부’(신하이자 사부라는 의미)라고 이름 지어 줄 정도로 신뢰가 있었고,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원종공신에 책록됐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은거했다.

고신부의 손자인 고상지(6세)의 아들 4형제 중 고자검이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사원종공신이 되고 광주로 이거했다. 그의 아들 고운(1479~1530)은 형조좌랑을 지내고 조광조와의 친교로 기묘사화에 연좌돼 파직된 현인이다. 맹호도를 그리고 백이론·시편 등을 쓴 화가이자 문필가다.

◇ 순국한 부자 의병장 후손

9세인 고맹영(1502~?)은 옥천군수, 이조·호조 참의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고경명(1533~1592)은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한산과 순창 군수, 동래부사를 역임했으나 낙향했다. 임진왜란을 맞아 전라도 각지로 격문을 보내 의병군을 모으고 유팽로, 안영 등과 혈맹을 맺었다. 광주에서 출발해 담양·남원 등지의 의군을 전주에 모으고 7천 병력으로 북상하여 왜군의 호남 진격을 막기 위해 금산에서 격전 중 전사했다. 시호는 충열공으로 광주 포충사에 제향해 그와 고씨 일가의 장열한 공훈을 대대로 추모한다. 가문에서는 함께 순절한 노비까지도 제단을 마련해 충절을 기리고 있다.

그의 두 아들 고종후(1554~1593)와 고인후(1561~1592)가 왜란에 순절한 3부자 공신으로 효열공, 의열공 시호를 받아 부친과 함께 제향됐다. 고종후는 임피현령, 지제교 등을 역임하고 임란에는 흩어진 군대와 군량 등을 모아 부친의 의병군에 합류했다.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부친과 아우의 복수의병군을 재규합해 진주성에서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과 함께 싸우다 사면초가에 몰리자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그가‘진주 삼장사’의 한사람이다. 고인후는 승문원정자를 역임하고 부친의 의병군에 합류하여 금산에서 전사했다. 그의 처가인 창평에서 세거한 학봉파가 창평고씨로 번성했으며 훗날 고광순(1848~1907) 일가가 한말 의병을 이끌어 의로운 가통을 계승했다.

고인후의 현손인 중시조 15세 고응수(?~?)가 장흥에 입향했고, 그의 셋째아들 고만거(1698~1756)가 장흥 평화에 종가를 열었다. 21세인 고언주(1816~1886, 호는 정담)는 학문과 덕행으로 통덕랑에 천거됐다. 그가 종택을 중건하고 정원을 조성해 현재의 무계고택에 이른다. 이 때 조성된 연못이 ‘정담’이다. 23세 고재극(1862~1901)이 목릉참봉을 지내고 낙향해 종택을 중수했다.

◇ 더불어 잘 살아야… 밤·편백 수림 조성

고재극의 손자인 24세 고영완(1914~1991, 호는 무계)은 독립운동으로 건국 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는 일본에 유학한 법학도였지만 독립운동 전국조직을 준비하다 옥고를 치른 후 종가를 지키며 고장을 위해 헌신했다. 장흥군청까지 연결된 2km 도로의 개설을 위해 가문의 땅을 기부했고, 종가 뒷산에 편백숲을 조림하고, 해방 후에는 장흥중학교 건립과 마을 공간을 위해 재산을 기부했다. 2만주의 밤나무를 이웃과 함께 식재하는데 재원을 제공했고, 인근 가난한 양민들이 채취해 가도록 공개하며 ‘더불어 잘살아야 한다’는 신조를 남겼다. 정원과 수림 외에도 테니스장과 공동수영장을 만들었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가 혜안을 가진 문화 선각자였음이 증명됐다. 고만거종가는 “충효”를 가훈으로 계승하고 보존에 힘썼고 이제 명승 지정으로 일반에 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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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롱나무 꽃 만발한 연못 전경(장흥군 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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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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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마당, 창고, 우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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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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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연못 송백원 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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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연못 둘레에 조성한 베롱나무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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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조성된 100년 수령의 백일홍들(베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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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뒷뜰에 핀 애기동백과 아담한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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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가운데 섬에 우뚝솟은 소나무 보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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