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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신안주씨(新安朱氏) 대종가 <49>성리학 집대성한 ‘주자’ 후예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화순 신안주씨(新安朱氏) 대종가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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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집대성한 ‘주자’ 후예…800년 전통

중국 신안주씨 한국에도 번성
가학 계승 청백리 실천한 고려명문
절의 지켜 은거하고 수난 이겨내
‘주자묘’ 한·중 참배객 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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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사. 주자묘 내에 신안주씨 주잠, 주여경, 주열, 주인장, 주인원, 주인환을 추모하는 사당 ‘회덕사’가 있던 자리에 건립한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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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묘. 안면에 북두칠성 형상의 점이 확연한 ‘주자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주희 추모공간이다.

고려시대 이후로 우리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성리학은 조선 건국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해 세종대왕이 ‘주자대전’ 목판을 제작·보급한 뒤 중국에서 보다 한국(조선)에서 더욱 꽃핀 동양의 전통사상이다. 주자학, 도학으로 칭하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중국 송나라의 주희(1130~1260, ‘주자’라고 높여 부름)다. 성리학의 발전 역정처럼 주자의 증손이 송말·원초에 고려에 귀화해 800여년 세대를 이어 번성한 한국의 성씨가 됐다. 중국의 안휘성 휘주부 신안현을 본관으로 전남 화순군 능주에서 세거하는 신안주씨(新安朱氏) 대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주희 증손 주잠을 한국 시조로
신안주씨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의 후손이다. 주희의 증손인 4세 주잠(1194~1260, 호는 청계)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남송에서 과거급제하고 벼슬은 한림학사를 거쳐 비서각 직학사를 역임했다. 송나라가 몽고의 침입으로 쇠락하자 1224년 가족과 문인 7학사(도성하·두행수·섭공제·유응규·조창·주세현·진조순)와 함께 나주 영산포로 입국했고 화순 능성(능주 옛이름)에 은거했다. 학사들을 압송하려는 원나라의 수색을 피하지 못한 섭공제와 조창은 원으로 소환됐지만, 주잠은 추적을 피해 적덕으로 개명하고 전북 진안 주천면 신안촌(주자천변)에 이거해 서당을 열고 주자학을 전수하다 능성으로 돌아와 사망하고 주천서원(전북 문화재자료 제142호)에 배향됐다. 신안주씨는 주잠을 한국의 시조로 모신다.

◇주열은 물과 같이 맑은 청백리
중시조 2세 주여경(?~?)은 은사과(과거시험의 일종)에 등과하고 벼슬은 좌승상·추밀원밀직사를 지냈다. 화순 동면 귀후재(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59호)에 배향됐다. 후손들은 그의 묘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나 나주의 도로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지석(무덤 소재를 기록한 판석)으로 인해 주자묘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주여경의 아들인 3세 주열(1227~1287)은 문과에 급제하고 삼도안렴사·한림학사를 거쳐 지도첨의부사를 역임하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의 무리한 요구를 철회토록 설복해 구국재상으로 고려사 열전에 기록됐다. 좌리공신으로 능성군에 봉해졌다. 주열은 활달한 성격으로 문장과 필법이 능했으며 공정·청렴을 한결같이 지키는 어진 선비였다. 반면 술을 좋아 하고 외모가 특이해 코가 귤이 익어 터진 것 같았다고 한다. 제국공주를 환영하는 잔치에서 잔을 올리는 주열의 외모를 보고 ‘어찌 추한 귀신이 내게 가까이 오게 합니까?’라는 공주에게 충렬왕은 ‘이 노인 외모는 귀신처럼 추하지만 마음은 물과 같이 맑다오’라고 하니, 공주가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의 주자 후손은 ‘신안주씨’
주열의 세아들 대에서 능성파, 웅천파, 전주파로 분파됐다. 4세 주인장(1243~1315, 시호는 정숙)은 김우의 문하에서 공부해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한림학사를 거쳐 예부상서에 오르고 퇴관 후 화순 능주에서 여생을 보내며 능성파의 1세가 된다. 그는 선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도학을 실천하고 제도와 학문 정립에 주력하며 민생을 살펴 억울함이 없도록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주인장의 아들 주의(1278~1366)가 충렬왕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 혼맥을 맺었다. 능성파의 후손들은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 은거하며 전국에 흩어져 가난과 신분 불확신의 수난을 겪어야 했지만 가학의 전통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거듭된 상소의 결과 영조대에는 주자 후손인 주씨들에 대한 잡역 면제가 왕명으로 내려졌으며 정조, 순조, 철종 대에도 가문에 대한 왕의 존경 의사 표시가 있었다. 능주에 세거하기 때문에 능주주씨라고도 칭했는데 1902년 주석면이 상소해 조선의 주씨들은 모두 본관을 주자와 동일하게 중국 지명 ‘신안(新安)’으로 복관하도록 하는 고종의 칙명를 받게 됐다.

◇한중교류 주자학당 건립 추진
능성파 후손인 13세 주엽(1596~1638)은 은봉 안방준 제자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학문에 정진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군에 참여해 활약했다. 주석환(1893~1955)은 독립운동가로서 1919년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 사령부 모험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국내로 파견돼 정의단 조직, 군자금 송금, 일제헌병주재소·관청 등에 폭탄 투척하는 등의 활약으로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후 조국광복으로 환국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종가는 주자를 제향하는 주자묘(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53호)를 건립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찾아오는 많은 참배객을 위해 교육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주자학당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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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 진영. 주자묘 사당에 모셔진 주희(주자)의 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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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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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에서 바라본 내삼문(신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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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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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루 아래 주자 친필 글씨를 모사해 대리석에 새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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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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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현판(주자 친필 글씨 모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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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루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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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공 주잠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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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잠의 지석. 도시개발로 인해 이장하고자 파묘한 주잠의 묘에서 관과 함께 발견된 지석 / 주진탁 신안주씨 대종가 차종손 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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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잠 지석2.. 7학사와 함께 동방의 나라 고려 금성(나주) 성주동에 온 때를 기록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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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경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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