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나주 함평이씨(咸平李氏) 참판공파 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입신양명 대신 학문수양…정자문화 꽃피운 가문
문무겸장 이종인 가문일으켜
이유근 명문장에 명 황제 감복
환난상휼 동계 설립 보산정사
영산강변 정자 보존 가치 높아

보산정사

영산강 줄기가 굽어 흐르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교 앞 죽지마을에는 16세기 호남유학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학자들의 문장과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소요정이 있다. 비록 사용 편의에 따라 변형됐지만 문장과 실천으로 이상사회를 꿈꿨던 선현들의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는 명소다. 이 마을에서 20여세대를 이어 세거하며 전란과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됐지만 향약과 동계로서 가학을 계승하고 정자문화와 미풍양속을 전승한 나주 함평이씨(咸平李氏) 참판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이광봉 함풍부원군, 이극명 함평군 
함평이씨는 고려 건국 공신으로 함풍군에 책봉된 신무위 대장군 이언을 시조로 모신다. 함평 나산 초포리 사산사에 시조를 배향하고 본관을 함평으로 천년의 세계를 잇고 있다. 5세 이광봉(?~?)이 충숙왕 때 원나라 사신으로 공을 세워 좌명공신으로 함풍부원군에 군봉됐다. 9세 이자보(?~?)는 모평감무를 역임하고 나주 회진에 입향했다. 10세 이극명(1388~1454)은 공신으로 추증돼 함평군을 하사받았다. 그가 나주 다시면 죽지마을에 터를 잡았고 아들 이종생, 이종수 대에서 분파된다. 이극명의 장남 이종생(1423~1495)은 정직·관후한 명장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신숙주의 군관으로 북정에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내금위장, 경상우병사, 부총관을 역임했고, 이시애의 난에는 위장으로 선봉에서 적을 대파해 적개공신 함성군에 봉해졌다.

◇추자도 왜적 섬멸한 명장 이종인
11세 이종수(1424~1483)는 충좌위부사정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증직돼 참판공파를 열었다. 그의 아들 이종인(1458~1533, 호는 소요당)은 문무겸전의 명장으로 무과급제해 해랑도초무사 종사관으로 해적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경상우수사, 전라도수사를 거쳐 왜적을 격퇴시키고 함경북병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올랐다. 추자도에 왜적이 침입했을 때 전라좌수사로 출격해 왜적을 섬멸했다. 소요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학문 수양하다 여생을 마감했다. 눌재 박상,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옥봉 백광훈 등 대학자들이 소요정에 시를 남겼다. 이종인의 조카 이임이 고봉 기대승의 장인이다.

◇당쟁 옥사 누명 벗고 충신 정려 받아
이종인의 손자인 14세 이유근(1523~1606)은 문과급제해 예조정랑, 지제교, 대구부사를 역임했다. 명나라 서장관으로 갔을 때 시로서 감복시켜 명 황제로부터 연주옥패를 하사받았고 두 아들에게 나눠준 옥패를 종가가 보존하고 있다. 동서붕당을 뒤로하고 낙향해 백호 임제와 회재 박광옥과 교유했다. 보산정사 8현(죽담 이유근, 이조참판 장이길, 남평군수 정상, 유수, 지중추부사 최희설, 전라병마절도사 이언상, 사헌부지평 유은, 사간원정언 최사물)과 함께 나주 보산사에 배향됐다. 15세 이지효(1551~1614)는 무과 급제해 만포진첨절제사, 충청 수사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 인목대비(선조 왕비) 폐모논쟁에 반대하다 계축년(1613)에 화를 입어 옥에서 사망했다. 이지효는 사후에 충신 정려를 하사받고 형조판서에 증직돼 신원이 회복됐다. 그의 아들 이선철(1584~1625)은 무과 급제해 겸사복을 역임하고 부친과 함께 계축옥사에 파직됐다가 인조 반정 후 누명을 벗었다. 다시 역모 누명을 쓰고 아들인 통덕랑 이정(1603~1625)과 함께 투옥돼 국문 중 사망했다.

◇자치 향약 실시 후학양성 계승
15세 이지득(1555~1594)은 겸사복내승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내어 의병을 모으고 활약하다가 흥양포(고흥) 전투에서 순절해 호남절의록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선경(1579~1626) 역시 임진 의병으로 활약했다. 초동마을 보산정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1호)는 이유근 등 8인이 창건하고 학문을 강론하며 기대승 등 명사들과 더불어 시문을 주고 받은 학문의 전당이다. 이곳에서 이유근의 동생 이유회(1534~1603) 등 10인이 사동 십호동계를 결성하고 자치 향약을 만들어 실시했다. 백일장 개최 등 향촌 교육의 도장으로 운영됐다. 종가는 옥패연주를 비롯해 농포유고·사은유고·남파유고 등 문집과 고문서, 소요정·남사정·남파정 등 정자, 이지효·이지득 충신정려 등 가문의 보배를 보존하며 선조들의 학덕을 계승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이유근이 명황제 희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고 전하는 주렴옥패(함평이씨 참판공문중 소장). 두 개를 하사받았는데, 하나는 함평이씨 밀양문중이 소장하고 있고, 남은 하나는 나주문중이 소장하고 있다. / 나주시 사진제공
보산사 사당
보산정사 강당. 초동마을 문과급제자 8명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향약을 실시했던 곳이다.
보산정사 현판
초동 동계 일괄 문서 안내판(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3호). 초동 동계 소장 일괄문서는 임진왜란 직후 등장해 1663년 향약으로 실시해 17세기 나주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 인정받았다.
남사정
남사정
남사정 현판
이지효 충열각
이지효 충열각 현판
소요정
소요정 현판
소요정에 걸린 눌재 박상의 시
고봉 기대승의 시
백호 임제의 시
석천 임억령의 시
옥봉 백광훈의 시
보산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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