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13> 서남해 남자 무레꾼의 소멸과 제주해녀의 고무옷

고무옷 등장으로 남자 무레꾼 결국 소멸
1970년대 초반 일본서 들여온 해녀 전용 고무옷 때문
겨울철에도 평소보다 오랜 시간 잠수 가능…남자 도태
고가 불구 첨단 기술 제품으로 생산량·소득 5배 향상

소라와 전복, 성게를 잡아서 해녀배로 돌아오는 완도 평일도의 해녀들의 모습. /송기태 교수 제공
무레질을 하기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신안 홍도 해녀들. /송기태 교수 제공

전남 서남해지역에서는 잠수를 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을 무레꾼 또는 잠질꾼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무레질을 하여 ‘무레꾼’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었으나, 제주 해녀들이 들어오고 차츰 여성들만 무레질을 하게 되면서 ‘해녀’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서남해지역 무레꾼 전통에서 특징적인 점은 남자 무레꾼의 존재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서남해 일대에서 남자 무레꾼이 존재했고 그들이 여자들과 함께 무레질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남자 무레꾼의 활동은 1960년대를 끝으로 중단되면서 파편화된 기억으로 전해지지만, 서남해 곳곳에서 남자 무레꾼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완도 평일도에서 무레꾼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고, 성별에 따른 역할이나 능력의 차이도 거의 없었다. 잠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남자나 여자 상관없이 함께 배를 타고 나가서 우뭇가사리, 미역, 전복, 소라 등을 채취했다. 당시에는 고무옷이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제주도의 물소중이와 비슷한 물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아래에 속옷만 착용하였다.

완도 평일도에서 젊은시절 무레꾼 활동을 했던 1930년생 유영준 어르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남자들 다 했어요. 우무, 전복도 잡고. 나도 했지. 무레를 했어. 거기 뭐야 톳도 하고 인자 삐죽(소라)도 하고. 전복 잡았제. 전복도 잡아 자연산. 남자가 많았어. 여자들이랑 같이 댕겼제. 여자는 서이 남자들이 여덟. 어짤 때는 여자들이 많고 어짤 때는 남자들이 많고. 추우면 나와서 인자 불을 피제.”

신안 흑산도 일대에서는 남자들의 무레질이 왕성했고, 그것을 특별히 ‘봉채질’이라고 불렀다. 홍도에 사는 이동석 어르신(83) 에 따르면 흑산도와 가거도 일대는 남자들이 주로 물질을 했고, 홍도는 여자들이 주로 물질을 했다고 한다.

“홍도는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주로 여자들이 해녀를 했어요. 그란디 흑산은 원래 여자들이 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했었어요. 흑산 읍동에 봉채 씨가 계셨어요. 남자 해남일을 주로 ‘봉채 한다’, ‘봉채질 한다’ 그러거든요. 그 사람이 제일 잘했어요. 그래서 그분 이름을 따서 남자들이 무레질 하면은 ‘봉채질 한다’ 그러거든요. 그렇게 남자들이 수경 쓰고 뭐하면, “저놈 봉채질하네.” 그러고, 어른들이 “어, 저놈! 봉채질하네. 잘한다. 잡았으면 좀 내놔라.” 하면 갖다드리고.”

서남해지역 무레질 전통은 제주해녀의 등장과 함께 많은 변동에 처한다.

19세기 말부터 제주해녀들이 한반도와 동아시아 일대로 진출하면서 서남해 섬지역도 제주해녀의 영향을 받게 된다. 제주해녀들이 전문적인 잠수능력을 기반으로 서남해에 진출하여 수중의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어떤 이들은 적극적으로 제주해녀를 고용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어장을 지키기 위해 수산당국에 항의를 하였지만, 점차 제주해녀의 영향력은 강해졌고 서남해의 무레꾼들과 공존하며 함께 해산물을 채취했다. 제주해녀들의 잠수 능력이 뛰어나 그들을 고용하여 얻는 소득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해녀의 진출은 서남해 남자 무레꾼의 소멸을 가져왔다. 그 주인공은 고무옷이다. 제주해녀들이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들여온 고무옷은 잠수능력을 배가시키는 첨단 기술이었다.

고무옷을 입은 제주해녀들은 평소보다 길게 잠수할 수 있었고, 겨울에도 물에 들어갈 수 있어서 물옷을 입었을 때보다 생산량과 소득을 5배까지 늘릴 수 있었다. 이때 고무옷이 제주해녀를 통해 서남해에도 전파되는데, 당시 고무옷은 모두 여성용만 들여왔다. 고무옷의 수요층이 대부분 해녀들이었기 때문이다.

완도 평일도의 유영준 어르신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제주해녀들 오면 옷이 있거든. 남자들 옷 없고 빤스만 입고 들어간디 추와서 못해. 우리는 안 입어봤어. 그 잠수복을 해녀들은 입고 나와서 안 춥거든. 근데 우리들은 빤스만 입고 들어간게 추와. 그래서 우리들은 오래 못하고 그분들이 해븐께 우리는 말아부렀어.”

1970년대 제주해녀들이 고무옷을 입고 등장하면서 서남해의 무레꾼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의 무레꾼들은 속옷만 입고 들어가서 작업을 하기때문에 몇 번 입수하지 않아도 추워서 몸을 녹여야 하는데, 고무옷을 입은 제주해녀들은 오랫동안 물속에서 작업을 해도 추위를 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주해녀들의 능력은 뛰어났는데, 고무옷을 입은 해녀들의 생산력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서남해 무레꾼들도 고무옷을 받아들이지만 여성용이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입지도 못했고, 또 전문적으로 무레질을 하는 것이 아니어서 고가의 고무옷을 구입해서까지 무레질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일본으로부터 고무옷을 들여온 후 착용 유무에 따라 생산능력의 차이가 커서 해녀사회의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서남해에서는 특별한 분쟁이나 대응 없이 여자 무레꾼들 위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제주해녀들로부터 전파된 첨단기술의 고무옷은 남자무레꾼의 소외와 소멸을 가져왔다.

글/송기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