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 선생, ‘사정칠단’을 논해 봅시다”
▲ =고봉 기대승 후손 기정룡이 정자 짓어 학통 계승

조선시대의 대학자 고봉 기대승 선생(高峰 奇大升·1527~1572). 그의 체취를 묻고 있는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 신촌리 등성이에 자리한 낙암정(樂庵亭)을 찾았다.
이 정자는 1934년 고봉의 후손 낙암 기정룡(樂庵 奇廷龍)에 의해 건립된 것이지만, 사실 그 뿌리는 고봉 선생으로부터 비롯됐다.
이 정자의 초건(初建)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낙암이건기(樂庵移建記)’에 따르면, ‘이 정자는 고봉 기대승 선생이 고마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활용해오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쇠락된 것을 후손 낙암 기정룡에 의해 중건된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낙암정의 텃자리를 잡아주었던 고봉 기대승 선생의 행적을 들여다 보자.
고봉은 1527년(중종 22) 광산구 임곡에서 학자 기진(奇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총명해 그의 나이 15세에 이르자 옛 성인을 그리며 글을 배우고 익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예법(禮法)과 산수(算數)에 관한 학문에는 이를 전문으로 하는 대가에 못지 않았다.
1549년(명종 4) 초시(初試)에 들고 1558년(명종 13)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에는 호당(湖堂)에서 공부하고 주서(註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流, 새로 진출한 유학자와 문인)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 세조가 임금자리를 빼앗을 때 공을 세운 사람)에 의해 벼슬을 빼앗겼다.
1567년(명종 22)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듬해 선조가 즉위 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 홍문관에 딸린 종 3품 벼슬)이 되어 조광조(趙光組)·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 죽은 뒤 벼슬을 높여줌)을 강력히 건의하기도 했다.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시독관(侍讀官,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직책)을 겸직 하였고 1570년(선조 3) 대사성(大司成)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사이가 나빠 그만 두었다. 뒤에 대사성에 복직 되었지만 사퇴하고 이듬해 다시 부제학이 제수 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대사간을 잠시 지내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그해 8월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병세가 악화돼 그해 11월 전북 고부에서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고봉이 타계하자 1590년(선조 23)에 조정에서는 생전에 세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추록, 덕원군(德原君)에 봉해 졌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주어지고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내렸다.
선생은 사물을 보고 헤아리는 생각이 남달리 뛰어나서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 일제(一齊)· 퇴계(退溪)와 서로 오가면서 선학(先學)들이 미처 깨우치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내보이기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 많은 일화 가운데, 퇴계와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람의 본성에서 우리라는 네 가지 마음씨와 일곱가지 심리작용)에 대한 논변(論辨)은 지금도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특히 8년 동안 자신들의 학설을 주고받은 편지는 조선 성리학계의 2백년간의 논쟁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율곡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이르기를 “고봉은 어릴적부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사물을 넓게 보고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기품이 호걸스러워 담론하는데 좌중 사람들을 승복하게 만들었다”고 극찬하고 있다.
저서로는 평소 임금의 물음에 대답했던 것을 사관(史官)이 기록한 3권의 ‘논사록(論思錄)’과 시문집(詩文集) 및 퇴계와의 ‘왕복서간집(往復書簡集)’, ‘종계변무주청문(宗系辨誣奏請文)’등이 있다.
현재, 낙암정에는 고봉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학통을 후손 낙암(樂庵)이, 다시 지역 유림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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