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지경인데 공명부귀 웬말인가”
▲ =유충정 선생, 政爭에 환멸… 낙향해 기대승 등과 교류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피 뛰기는 정쟁(政爭)에 환멸을 느껴 공명부귀(功名富貴)를 버리고 낙향, 초야에 묻혀 마음을 닦으며 평생을 지냈던 조선 명종 때 선비 장춘 유충정 선생(藏春 柳忠貞· 1509~1574).
나주군 다시면 죽산리 화동마을 안쪽에는 그의 정신을 오롯히 묻고 있는‘장춘정(藏春亭)’이 자리하고 있다.
‘장춘(藏春)’이란 이름 때문인가. 정자의 주변에는 한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숲과 사시장철 피고 지는 꽃들이 항상 봄을 간직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561년(명종 16) 장춘 선생에 의해 건립된 이 정자는, 퇴계 선생과‘사단칠정론’을 논했던 조선시대 대학자 고봉 기대승을 비롯해서 면앙정 송순, 사암 박 순, 석천 임억령 등 인근 선비들의 출입이 잦아 ‘학문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자의 주인 장춘 선생은 고흥유씨 유해(柳 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1534년, 중종 29), 부안현감을 시작으로 강진현감, 김해부사, 장흥부사 등의 수령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로 부터 추앙을 받았다.
장춘정의 역사는 정내(亭內)에 결려있는 고봉 기대승(1527~1572)선생의 ‘장춘정기(藏春亭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정기(亭記)에는 장춘 선생의 학문과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판단할 줄 아는 인물의 됨됨이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춘 선생의 행장들은 정내(亭內)에 즐비하게 걸려있는 당대 학자들의 글귀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면앙정 송순(1493~1583)을 비롯 석천 임억령(1496~1568), 원기 오상(1512~1573), 풍암 임복(1521~1576), 사암 박순(1523~1589), 고봉 기대승(1527~1572), 연파 박개, 손재 박광일, 백호 임제(1549~1587), 안위, 설봉 강백년(1603~1681) 등의 글들이 모두 그 것들이다.
장춘 선생이 부안 현감으로 재직시절, 서해 바다에 출현했던 해적을 일소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을 비롯해서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당시 순찰사 안위와 함께 칠산 앞바다에서 왜적의 전함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장춘 선생이 온성부사로 재임할 때의 일화는 지금도 후세에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선생은 무관으로서 위기에 몰려있는 나라를 위해 북방의 육진을 평정, 북관을 안전케 했지만 어지럽게 돌아가는 나라꼴에 대한 환멸을 느낀 나머지 부귀영화를 버리고 낙향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이 남긴 글 한 구절은 지금도 마음을 뜨겁게 한다.
‘이광이 비록 명장이나 평생에 제후를 얻지 못하였고, 나도 차라리 옛집에 돌아가 한가로이 금강에 낚싯대나 드리울거나…’라며 당시의 암담한 정치현실을 이렇게 적고있다.
장춘정에 대한 기록은 관찬지리서인 ‘여지도서’(1757년)을 비롯 ‘호남읍지’, ‘나주목읍지’들에서도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정자의 뒷편에는 봄·가을로 화려하게 피어내는 동백나무 숲을 이루고 있고, 옆엔 장춘정의 역사와 함께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등 아름드리한 노거수가 서 있다.
장춘정은 정면 3간 측면 2간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방1간 대청 2간으로 구성돼 있다. 1818년과 1930년의 중·보수를 거쳐 올해 4월 전라남도 기념물 제201호로 지정됐다. 그림·사진/ 한국화가 장복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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