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년전 民主 불씨 지핀 광주 향약 발원지
▲ =여말선초 때 김문발, 1416년 건립‘향약좌목’첫 시행
▲ =고경명·이안눌·박제형 등 名儒 누정제영 편액 즐비

아침에 실낱같이 가는 비 내리더니/ 저녁되니 맑은 빛이 푸른 못에 넘실거리네/ 아름다운 모임 어찌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사군(使君)의 행색 저절로 응당 더리리. <양응정 의 ‘부용정 운’>

광주시 남구 칠석동 2리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부용정(芙蓉亭)’, 정자의 명칭으로 보아 당연히 있어야 할 연방죽(蓮池)은 찾아 볼 수 없고, 황량한 초겨울의 바람만이 세월의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부용정은 여말선초(麗末鮮初) 때 필명을 날렸던 광주 출신의 선비 부용 김문발(芙蓉 金文發·1359~1418) 선생이 지역 인재들의 강학과 선비들의 시회장(詩會場), 향촌 규율과 민주적인 여론 수렴을 위한 향약의 집회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1416년에 건립했다. 특히 이 곳은 제봉 고경명을 비롯 양송천, 이동악, 박제형, 김향 등 당대 선비들의 출입이 잦았으며, 광주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향약을 시행했던 정자이기도 해 유서가 남다르다.
광주 평장동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도학사상에 심취했던 부용 선생. 그는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해 오던중 임금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져 천거돼 형조참판과 전라감사, 황해도 관찰사 등 관직을 역임했으나 어지럽게 돌아가는 나라꼴에 환멸을 느껴 낙향해 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정자의 이름을 ‘부용(芙蓉)’이라 불리운 것은 김문발 선생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 깊은 내면에는 연(蓮)을 꽃 중의 군자(君子)라고 칭송했던 북송(北宋)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設)에서 취했다.
김문발 선생은 1418년(태종 18)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래, 여씨(呂氏)의 남전향약(南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을 모방하여 풍속 교화에 전념했다. 이것은 곧 그 유명한 광주 향약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됐던 것이다. 또 부용 선생은 이곳에서 이시원(李始元), 노자정(盧自亭) 등과 학문을 논하며 광주의 정신문화 발전에 불씨를 붙이는 역할을 했다.
정자의 건물은 정·측면 다같이 3간으로 기둥머리에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으로,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 민흘림기둥을 세웠고 홑처마로 건립됐다.
기단은 네모 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였고, 좌우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았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고 연골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현재 정내에는 현판과 함께 당시의 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양응정(梁應鼎)의 시문을 비롯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권필과 쌍벽을 이뤘던 대학자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후대 명유(名儒)들의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새긴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이와함께 정자 주변에는 칠석마을 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전수관과 부용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기념물 제10호)가 서 있고, 부용정의 내력이 쓰인 부용정석비(芙蓉亭石碑)가 간간히 이 곳을 찾는 길손을 맞고 있다. 그림/한국화가 장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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