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향약좌목’영향… 양과동계 태동
▲ =이선제·이 발 등 걸출한 큰 선비 배출
▲ =송시열·고경명 시문 걸려 옛세월 체감

지금으로 부터 400여년 전, 광주 지역의 큰 선비들이 둘러앉아 어지럽게 돌아가는 나랏일을 걱정하고, 향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향약을 시행했던 양과동정(良苽洞亭). 광주시 남구 양과동 마을 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정자는 ‘양과동정’이란 명칭 이외에도 간원대(諫院臺) 또는 고경명(高景命)의 별서(別墅)로도 불리우고 있다.
‘간원대’란 이름은 이 곳에 드나들었던 선비들이 간관(諫官)으로 많이 배출, 여기에서 국사(國事)를 의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자의 제액(題額)을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1607∼1689)이 쓴 것으로 보아 1600년대 중반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자 내에는 동정입의서(洞亭立議序)와 중수기(重修記), 고경명의 제양과모정(題良苽茅亭), 박광옥(朴光玉)의 차유곡모정운(次柳谷茅亭韻), 제간원대(題諫院臺), 향약 등과 관계된 현판이 걸려 있어 당시의 옛 영화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정자는 고려말 조선초 대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광주출신 김문발 선생(金文發·1359~1418)이 1418년(태종 18)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태동시킨 광주향약좌목(光州鄕約座目)의 영향을 받아 홍치년간(弘治年間 1488∼1505년)에 이루어진 동약 ‘양과동계(良苽洞契)’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김문발 선생과 함께 광주향약좌목을 발의한 이선제(李先齊·1389∼1454)가 이 마을 출신이며,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돼 화를 당했던 이 발(李潑 1544∼1589, 이선제의 5대손) 역시 이 정자와 많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1604년에 작성된 중수조목(重修條目)에 따르면,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원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동약들과 대개 비슷하나 벌칙과 세부 지행규칙인 별규(別規)에서는 독특한 개성을 살필 수 있다. 양과동 동약은 모두 4권의 좌목이 있다. 이것은 동계원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현재 마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좌목은 옛날 것을 일괄 정리해 동계에 가입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어 각 시기의 동계원 구성자료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의 성씨 구성원이 현재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마을에 보관된 문과안(文科案)과 사마안(司馬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동계의 조목 중 이의 실시를 30리로 한정한 내용이 있다. 이는 동계의 범위를 한정한 것으로 여러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786년 동각(洞閣)을 중수하면서 작성한 물자수합록(物資收合錄)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동답기(洞沓記)와 완의(完議)는 동약의 물적기반인 사회경제적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동장(洞長)과 공사원(工事員), 유사(有司) 등의 동약 조직과 소속 전답을 적고 있다. 동약이 별도의 부세와 관련된 경제력까지 간여하고 있어 상부상조의 기능을 넘어 보다 큰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자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바람 막는 판이 설치돼 있다. 기단은 바른층 막돌쌓기를 하고 덤벙주초를 놓고서 원형기둥을 세웠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은 연목(椽木)의 연골이 그대로 들어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다. 기와의 문양은 숫막새는 날개를 펴고 있는 백조 문양이고, 암막새는 거북선 모양이며 현재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12호로 지정돼 있다.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양과동정 주변에는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만이 간간히 찾는 길손들의 옷깃을 곧추세우게 한다.
400여년전 전라도 지역에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폈던 양과동정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계단 위로 계절을 재촉하는 낙엽 몇 잎이 뒹글고 있다. 그림/한국화가 장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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