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대장군 임비 원조, 충신 임탁 입향조
문과·무과·소과 합격 인물 다수 배출
보국충정·후진양성엔 가산까지 바쳐
유산 보존 간찰집 발간 정신계승 힘써

붓·검 갈고닦아 절의(節義)지킨 가문

추원당 전경(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

영산강이 굽어도는 전남 나주 다시면 회진마을은 최초의 국제포구 회진포(풍호나루)가 있었던 명촌이다. 복암리고분군, 회진고성, 백호문학관, 천연염색박물관, 영모정 등 수많은 유적으로 둘러싸인 회진에서 세거하며 천년고읍 역사보다 빛나는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나주 나주임씨 절도공파 강계공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감무 임탁 절의 지켜 낙향 은거
나주임씨는 고려 충렬왕의 원나라 입조 때 호종해 시종공신에 오른 대장군 임비를 원조로 모신다. 나주임씨는 회진을 본관으로 한 회진임씨였다. 마한시대부터 조선 태종 때까지 천년 동안 치소가 있던 ‘회진’을 본관으로 해 왔던 임씨 가문은 1800년 족보부터 행정구역에 맞춰 나주임씨로 개칭했다. 9세 임탁(?~?)은 고려말 해남감무을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 절의 지켜 두문동에 은거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금성(나주) 회진에 입향했다. 그의 유지에 따라 3대가 100여년 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4세 임평(1462~1522)은 무과급제해 전라도병마우후를 역임하고 중종반정에 참여했다. 그의 아들인 15세 임붕(1486~1553)은 성균관 태학생 240명의 소두(대표)로서 조광조 구명을 위해 호곡 상소에 나섰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붓을 던지고 낙향했다. 뜻을 같이하던 나주 출신 선비 11인과 함께 금강계를 조직해 학문하며 향촌사회 개혁에 힘썼다. 그후 문과급제하고 승지·절도사·경주부윤을 역임했으며, 명종의 배려로 고향 인근 광주목사로 부임, 재직 중 순직했다. 그의 아들 4형제 임익(장수공파), 임복(정자공파), 임진(절도공파), 임몽(첨지공파)이 각각 분파해 가문을 부흥시켰다.

◇임평·임붕·임진·임순·임축 대대로 급제
16세 임복(1521~1576)은 문과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등용됐다가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유배됐다. 문과급제 동기생 계회 5인(광주목사 최응룡, 전라도관찰사 강섬, 승문원정자 임복,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 낙안군수 남효용) 중 한명으로 광주 희경루방회도(보물 제1879호)에 등장한다. 그의 동생 임진(1526~1587)은 무과 급제하고 훈련원판관을 거쳐 5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제주목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임금으로부터 ‘정절집’(도연명 저)을 하사받았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서 흑산도 일대 해적을 소탕한 공적이 있고 평안도병사 시절 지은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해진다. 그가 절도공파를 열었다.

17세 임순(1553~1600, 호는 해은)은 무과 급제해 선전관, 함흥판관을 거쳐 강계부사로 재임 중 관아에서 순직했다. 임진·정유 전쟁 때 북방 경계를 굳건히 하고 군비 조달, 반적 토벌의 공을 세웠다. 그로부터 강계공 종가가 16대를 잇고 있다. 임순의 5형제 중 큰형 임제(1549~1587, 호는 백호)는 문과급제해 홍문관지제교를 지낸 천재시인으로 임백호집을 남겼다. 임순의 동생 임환(1561~1608)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의병장의 종사관으로 참전했다가 진주성 전투에 참전 못한 원통함으로 가산을 털어 이순신 장군에게 군량을 대고,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으로 순천 왜교성전투 등에 공을 세웠다. 임금으로부터 ‘소의장’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그가 무주현감으로 있을 때 형인 백호 임제의 선몽에 따라 ‘한풍루’(보물 제2129호)를 중건했는데(1600년), 훗날 강계공 종가 후손인 23세 임중원(1726~1788)이 무주부사로 재임하던 중 자비를 들여 중수함으로써 보물이 지켜지게 됐다.

◇독립운동·학교설립 등 의행 계승
18세 임축(1577~1624)은 정유재란에 음직 선전관으로 참전한 후 무과급제했다.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해 친국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파직·유배됐다. 인조반정에 참여했고, 기장현감을 거쳐 관북운량관 직무수행 중 사망했다. 19세 임장유(1618~1672, 호는 율옹)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낙향해 ‘자효당’을 짓고 은거하며 학덕을 쌓다. 그의 아들 임호(1645~1709) 등 후손 11명이 문과급제했고, 임치, 임성 등 후손 30명이 사마시(생원·진사)에 합격해 빛나는 가학을 이었다. 25세 임긍수(1800~1876)는 문과 장원급제해 성균관대사성, 승지, 대사헌을 거쳐 공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홍문관제학으로 문헌공 시호를 받았다.

29세 임종순(1880~1939)은 일제강점기에 나주 금주단연회동맹을 결성해 야학과 독립자금 조성 등 민족경제자립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아들 임용택(1905~1980)은 1931년 회진개혁청년회를 창립해 계몽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동생 임은택 등 집안사람 7명과 함께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 민립 회진국민(초등)학교를 설립을 주도하며 후진교육에 앞장섰다. 종가는 비록 일제 때 350년 종택인 자효당과 백하정이 해체되는 수난을 겪었지만, 정절집 등 고문서를 비롯해 추원당, 임장유묘비(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 호랑가시나무(보호수)를 보존하고 있다. 또한 가훈 ‘인지위덕(忍之爲德, 참는 것이 덕이 됨)’을 지키며, 1천여 통의 보존 간찰 중 155통을 번역해 사진과 함께 간찰집을 발간하는 등 선조의 학덕과 의행(義行) 계승에 힘쓰고 있다.
/글·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 사진제공 ·임경렬(강계공 종가 봉사손)

[활 지어 팔에 걸고] - 임진(1580년 평안도병마절도사)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변에 통개 베고 잠을 드니
보완다 보왜랏 소리에 가슴 선뜩하여라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에 수록된 시조로서 조선조 무장 삼절에 오른 명시
*철옹성변 : 평북 영변 철옹산 성벽
*통개 :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메는 가죽부대
*보완다 보왜랏 : 군대 야영 시 군졸이 잠들지 못하도록 외치는 소리

자효당도 / 화가 무량 작
추원당
정절집. 도연명이 지은 책으로 청백리 임진이 임금에게 하사받은 책을 종가가 보존하고 있다.
회진개혁청년회 기념비
종가가 보존한 간찰 1천 여통 중 일부
추원당 현판. 효문공 신석희의 글씨(신석희는 고종 때 판서를 지내고 경복궁 근정문 현판, 광화문 상량문을 쓴 명필)
임장유묘비. 추원당과 함께 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됐다.
300년 된 호랑가시나무. 보호수로 지정됐다.
종가가 발간한 종가 간찰집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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