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정조 어명 ‘본관을 창원→곡부로’
불사이군 유배지 여수 삼일포
명필 공부, 명현 공서린 배출
화순 천동 입향 6백년 세거

청빈한 삶의 태도 계승한 공자의 후예

고산서원 전경. 고려 충신 공은을 배향한 여수 삼일동 낙포 인근의 서원이다. 후손 공병철씨는 “이 서원은 고흥, 화순, 순창, 창원, 마산, 밀양 등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시제를 모시며 훌륭한 선조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마련된 소중한 공간이다. 불사이군 절의를 지킨 충신을 추모하는 유서깊은 장소를 잘 보존하도록 가문 종원들이 마음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화순 동면 천운산 자락 화순천이 흐르는 ‘샘골’,천동마을은 아름다운 풍속이 전승되는 전통마을이다. ‘원천(源泉)’이라는 마을 샘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샘을 청소하고 변함없이 샘물이 솟아나기를 기원하는 샘굿이 여전히 열린다. 곡부공씨가 여수 삼일포에서 옮겨 와 샘 옆에 집터를 잡고 정착해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된 유학사상을 실천하며 600년을 이어 온 곡부공씨 고산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귀화한 고려 문하시중 공소 한반도 시조
곡부공씨는 공자(BC551~BC479)를 시조로 한 단일본의 성씨다. 공자는 전국에 있는 향교 서원마다 추모하는 동양의 성현이기 때문에 가문의 자부심이 높다. 한반도에 동래한 공씨가 중국 산동성 곡부를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조선 정조대왕의 어명 때문이다. 고려말 공자 54세손 공소가 원나라 공주를 수행해 고려에 와서 귀화했고, 기묘명현 공서린의 9대손까지 용인에 살고 있다. 공자 탄생일에 즈음해 공자 자손을 우대할 방안으로 벼슬을 주고 공씨의 본관을 곡부로 하라고 정조가 명했다.(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공소(1304~1381, 호는 창암)는 원나라 한림원학사를 지내다가 1351년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며 입국해 고려에 귀화했다. 목은 이색과 교유해 벼슬은 문화시중평장사에 올랐고 회원군에 봉해졌다. 그가 창원공씨의 시조로서 정조 때 이후 개칭한 곡부공씨 중시조가 된다. 공소의 아들인 2세 공여(1329~1413)는 집현전 태학사, 평장사, 지응양군천우위대장을 지냈다. 손자인 3세 공부(?~1416, 호는 어촌공)와 공은(1348~1403, 호는 고산)인데 각각 어촌공파와 고산공파로 분파했다.

◇절의 지켜 유배온 ‘공은’ 고산공파 열어
3세 공부는 시문에 뛰어나고 초서, 예서에 능한 명필로서, 고려 말 집현전태학사를 지내고 조선에서는 벼슬을 사양하다 태조의 부름을 받아 성균제주, 제학, 한성판윤, 보문각대제학을 역임하고 좌명공신에 올랐다, 사은사, 서장관 등 명나라 사신으로 6차례 다녀오고 1416년 천추사로 갔다가 명에서 순국했다. 한산군이색(목은)신도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 서천 문헌서원)와 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 양주 회암사) 비문의 글씨를 남겼다. 그의 후손 어촌공파에서는 기묘명현 공서린(1483~1541, 호는 휴암)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공부의 동생인 공은은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배우고 성리학을 강론한 고려충신으로서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고 불교 폐단을 상소하여 안동에 유배됐다.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에 은거해 절개를 지키다가 태종의 출사명령을 사양하고 순천 삼일포(현재 여수 삼일면)에 유배되며 ‘순천적소시’ 등 명시를 남겼다. 그가 유배 10년만에 절명하자 3일 동안 기러기떼가 모여들고 그중 한쌍이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로 인해 삼일포, 비락주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여수 고산서원을 비롯해 두문동서원과 경현사, 고려통일대전 등에 배향되고 그가 고산공파를 열었다.

◇절의 절명 설화 삼일포 지명에 전승
공은의 손자인 5세 공전은 세거하던 여수에서 화순 동면 천덕리 천동마을에 입향했다. 그의 손자인 7세 공규(1432~?, 호는 학당)는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통달한 학자로 알려졌고 예문관 봉교, 제학을 역임했다. 13세 공상린은 1528년 문과급제하고 예조좌랑, 사간원정언을 역임했다. 20세 공성학(1879~1957)은 시문에 능한 문관으로 고종 때 문과 급제해 성균관부제학을 역임하고 일제의 자본 침략에 저항한 민족기업가다. 일제치하에도 인삼 경작 혁신을 주도하고 해외 판로를 개척하는 개성인삼조합장으로 활동하고, 고려삼업주식회사, 개성전기주식회사 등 민족계 회사를 설립 운영하는 기업활동으로 알려졌다.
곡부공씨 고산공파는 3대종손 공전부터 화순 천동에 세거하고 있고 현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매년 시제일에 고산서원과 영모재 등에 모여 추모하며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후손들은 고흥 풍양과 여수 삼일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경남 창원, 마산, 밀양, 전북 순창 등 사는 곳을 달라도 위대한 가통의 자부심으로 가문을 지키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고산서원 여일재
영모재
종가터 옆 우물 ‘원천’
고산서원 문간채
공자 초상. 고산서원 소재.
여일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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