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여,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라”
일제강점기 전남 나주서 태어나 15살 때 상경
연탄배달·중국집 종업원 등 안 해본 일 없어
30살에 독립해 1987년 ‘신선설농탕’ 창업

“내가 먹는다 생각하고 음식 만든 게 성공비결”
자신에겐 ‘자린고비’ 국가발전엔 거금 쾌척
조장희 박사 MRI-CT 연구비 8년간 지원
지스트 교수회관 건립 1억5천만원 기부도

 

오억근 신선설농탕 회장은 “시대에 뒤떨어지면 낙오될 수밖에 없다”며 “ 항상 미래시대에 대해 공부하며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우리나라 전통음식인 ‘설렁탕’은 예로부터 값싸고 서민적인 음식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에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정규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했지만 설렁탕을 팔아 자수성가한 사람이 있다. 그는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쓸데없는 곳엔 자린고비처럼 쓰지 않고 절약한다.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돈을 써야 할 곳에는 아낌없이 쓴다. 연구비가 없어 어려움에 처한 연구자들을 직접 찾아가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바로 ‘신선설농탕’ 창업주 오억근(89) 회장의 이야기다.

오 회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살이부터 시장 지게꾼, 연탄 배달원, 음식점 종업원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렇게 번 돈으로 지역과 국가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조력자다. 그는 말 그대로 기부천사로 회자된다. 오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이들은 그를 그저 사업가라고만 부르지 않는다.

남도일보는 최근 광주과학기술원(지스트)에서 오 회장을 만나 신선설농탕의 성공신화를 이룬 경영철학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스페이스신선’ 음식문화예술 복합미술관

-맨손으로 신선설농탕을 창업해 큰 성공을 이뤄낸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회장님의 고향과 설렁탕집을 창업하게 된 배경을 말해달라.
▶1932년 전남 나주군 평동면 지죽리 3번지(현 광산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15살에 서울로 상경했다. 처음엔 자동차 계열 업종에서 일하고 싶었으나 취직이 안돼 중국집에 취직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 중국집 그릇닦기부터 시작해 요리도 배우고 돈을 모아 30살에 독립했다. 서울 보광동 3거리에 중국집 ‘인화원’을 개업했는데 가게가 잘 돼 1년 만에 빚을 모두 갚았다. 그런데 건물 주인이 가게를 비워달라고 요구해서 가게를 옮기게 됐다. 이후 계속된 사업실패를 겪다가 1981년 잠원동 ‘대림장’에서 설렁탕집을 오픈했다.
 

-신선설농탕에 대해 소개해 달라.
▶서울 잠원동 ‘대림장’설렁탕집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1983년 본격적인 기사식당인 ‘진국 설농탕’으로 상호를 바꿔서 운영하다 1987년에 오늘날의 ‘신선설농탕’으로 거듭나게 됐다. 현재 수도권 지역에 여러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또 설렁탕에서 메뉴를 확대해 소고기구이 전문점, 한정식 등 요식업뿐만 아니라 스페이스 신선 미술관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기반을 탄탄히 다져 놓았다고 생각돼 신선설농탕을 아들 오청 대표에게 맡기고, 나는 배우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철학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신선설농탕의 차별화된 경영 등 성공비결은 무엇인지.
▶처음 식당을 시작할 때부터 ‘내가 먹을 설렁탕이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항상 최고의 재료를 구해 정성을 다해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았다. 이러한 마음이 고객에게 전달돼 점심시간 때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성업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또한 배우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직원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독서경영을 했다. 이로 인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최하는 2014년 대한민국 독서대전에서 우수 직장에 선정된 바 있다.

더불어 직원들과 소통을 바탕으로 창의력을 경영에 반영, 애사심을 고취시켰던 것도 신선설농탕이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됐다고 본다.
 

김기선 광주과기원 총장이 오억근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회장님의 회사 경영철학과 인생의 좌우명은.
▶회사의 경영철학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라’다. 시대에 뒤떨어지면 낙오될 수밖에 없다. 항상 미래시대에 대해 공부하며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인생의 좌우명은 ‘우주전체를 포괄한 자아실현’이다.
창업 후 매출도 높아가고 운영이 잘 돼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영문을 모를 갈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봐도 명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사업도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있는데 자꾸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의학적으로 원인도 모르고 치료도 불가능했다. 한참 후에야 지적 결핍과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공허함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머리는 지식을, 몸은 음식을 먹고 산다. 그런데 뇌에 영양실조가 걸렸던 것이다. 처음엔 철학책을 구해 공부를 시작했으나, 한 페이지도 넘길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다시 책방에 가서 좀더 쉬운 자연과학분야의 책들을 구입해서 최소 3~4번씩 열독을 했다. 그러고 나서 철학책을 읽어보니 책장도 넘어가고, 마음의 갈등도 수그러들고 그제야 살맛이 났다. 공부에 대한 열망, 배움에 대한 결핍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알면 똑똑해 진다. 공부를 통해서 마음도 안정되고, 소년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소년 회귀는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한 공부를 계속해 지금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오억근 회장과 오두성 오씨종친회장이 광주과기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가 과학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기부활동을 많이 하고 계신데 그동안 발자취를 소개해 주시죠. 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1992년 조장희 박사가 한국과학기술원 서울분원에서 MRI-CT실용화 연구중 연구비 부족으로 MRI시설이 가동 중단 위기를 맞고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한 후 그를 돕기 위해 홍능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원을 찾아갔다. 두 번이나 방문했으나, 옷차림이 허름해서인지 정문 경비실에서 수위가 조 박사의 연구실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두차례나 거절당한 후 세 번째 방문해 조 박사를 어렵게 만나게 됐다. 이후 5년간 매월 400만원, 이후 3년간 매월 200만원 등 조 박사의 연구실이 문을 닫을 때까지 8년간 시설 가동비를 지원했으며, 수많은 연구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 결과 한국과학기술원은 영상시스템 및 NMR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해 국내외 저널과 각종학술대회에서 10여편의 우수 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인류에 공헌했다는 의미에서 한국과학기술원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지스트에도 1998년에 1억5천만원을 지원했다. 당시 지스트는 개원 직후로, 기관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식사를 대접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 같은 사정을 전해듣고 외국인 식당 건립비를 지원했다.

전국 오씨(吳氏) 대동종친회 제21대~23대 총재를 역임하면서 지역발전과 오씨 통합사업을 위해 나주시 삼영동 197번지 일원(5만2천800여㎡)부지를 매입해 기부했다.

2017년에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문을 연 ‘스페이스 신선미술관’은 입장료 대신 1천원 이상 자율기부를 하고 있으며, 이 금액은 사회공헌 활동에 사용되고 있다.

-앞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업 계획과 목표는 무엇인가. 끝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
▶독학으로 시작한 공부(자아실현)를 바탕으로 요즘 ‘하라의 인문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하라의 인문물리학’ 유튜버로 활동하며 영상물 40여편을 제작해 올려 놓았다. 하라 인문물리학이 우리의 삶의 근본을 찾아 가는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많은 경청을 바란다.

끝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며 자아실현을 통해 인간의 행복을 찾으라고 권면하고 싶다. 꼭 대기업에만 취직하려고 하지 말고 ‘리어카를 끌더라도 창업을 하라’는 메시지도 전하고 싶다. /김경태 기자 kkt@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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