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년 역사의 숨결·항일 의식 민족 자존심 고취
일본인 교장 배척 운동·나주학생운동 초시 의미
전라우영터·무학당 터 존재…동학군 처형도
가슴 아픔역사 담겨·역사적 인물 다양 배출
‘학생 행복한 학교 구현’·인성 중심 교육 실천

 

125년 역사를 간직한 전남 나주초등학교가 넓은 운동장과 함께 아름다운 학교 전경을 뽑내고 있다. /나주초등학교 제공
지난 2007년 나주초등학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탑이 멋진 기상을 뽐내고 있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옛것이 소중한 이유는 과거·현재·미래를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그 세월의 흔적들이 쌓이게 되면 누군가가 그것을 토대로 딱 그만큼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또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도 덩달아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우린 그것을 통틀어 역사라 부르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125년이란 세월속에서도 현재도 멈추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전남 나주초등학교는 그래서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다. 나주초등학교가 그 자리에 있는 한 그 누군가는 언제든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만의 추억 여행을 시작할 수 있어서다.
 

지난 1910년 기록된 나주초등학교 수업증서.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나주초등학교 역대 교장 선생님들의 사진 자료.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시간별 학교 명칭으로 보는 발자취

나주초등학교는 지난 1897년 나주공립소학교란 명칭으로 최초 설립됐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혼란의 상황에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도소재지에 소학교를 설립토록 했는데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엔 지역 군수가 학교장을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나주초등학교 초대 교장도 그 당시 나주군수(이우규)가 맡았다.

1907년 일본은 우민화, 친일교육 등 식민지 교육을 체계화 하기 위해 우리나라 국민에 의해 설립된 소학교를 대신해 보통학교를 세우게 했다. 이에 나주초등학교도 1907년 5월 20일 공립 나주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설립 당시 나주군청 소유 성내도청 건물을 가교사로 빌려 학생 22명, 교사 2명으로 운영됐다가 같은해 9월1일 현재 학교 위치(전남 나주시 남외1길 16)로 이전했다.

해방 이후인 1947년 무렵 나주국민학교로 다시 이름을 바꿨고 1996년 현재의 나주초등학교로 다시 바꿔 불리게 됐다.

나주초등학교는 공식 기록으론 지난 1911년 제 1회 졸업생(31명)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각에선 1909년이 실제 첫 졸업생 배출 연도란 주장도 있다.

지난 2007년 5월 20일 100주년을 맞이한 뒤 올해까지 2만2천655명의 졸업생을 배출, 찬란한 영산강 문화를 꽃피운 주역들을 키워냈다.
 

나주무학당 순교터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놓은 알림판.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나주초등학교 후문쪽에 남아있는 천주교도 순교터 및 동학농민군 처형장.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과거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동학군들이 처형 당했을 때 피가 흘렀다는 하천이 있던 자리.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숭고한 역사의 숨결

과거 조선시대를 전후엔 외세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각 지방 고을에 군영을 설치했다.

전라도는 강진에 있는 전라병영성을 중심으로 이를 보조하는 성격의 전라우영과 전라좌영을 뒀다. 전라우영과 좌영의 경우 영산강을 기준으로 좌와 우로 나눴다. 전라우영은 나주, 전라좌영은 남원에 각각 위치했다. 여기 전라우영 터가 현재의 나주초등학교 위치한 곳이다.

이에 학교 주변 곳곳에는 이를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무학당으로 불린 감옥터가 있고, 그 주변으로 처형장으로 사용한 장소도 남아있다.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활용된 활터도 있다.

지난 1866년 병인박해 이후 1872년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이 무학당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난 1895년엔 동학농민운동을 이끌다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던 녹두장군 전봉준 대장을 비롯한 동학군 상당수가 이곳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복개돼 사라졌지만 당시 나주초등학교 건너편에 위치한 재석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만들어진 하천이 존재했다. 이 하천에서 관군들이 일부 동학군들을 처형하면서 하천물이 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동학군들의 한 때문인지 나주초등학교는 운동회만 하면 비가 내렸다는 전설도 있다.
 

나주초등학교의 과거 모습이 모두 담겨있는 사진자료가 100년 역사관에 남아있다.

◇항일 정신 꽃 피우다

나주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선조들의 항일정신이 오롯히 담겨 있는 장소다.

지난 1918년 당시 나주초등학교 학생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인 카게이(影井市藏) 교장에 대한 배척운동을 진행, 전교생이 퇴학당했다. 이는 1919년 3·1만세운동보다 먼저 일어난 최초의 (학생)항일운동으로 의미가 크다. 학생들의 저항으로 결국 카게이 교장이 사직하고 오오쓰카(大塚啓次郞)교장이 교체부임하게 됐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도화선이 된 나주학생독립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29년 10월 30일 목포 발 광주행 열차에서 본교 출신 한 여학생(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을 일본인 남학생들이 희롱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목격한 조선인 남학생(박기옥의 4촌 남동생 박준채 등)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일본인 남학생들과 충돌을 했는데 일본 순사들은 일본인 편만 들고 한국인 학생들을 구타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공근, 박동희, 양영택, 유찬옥씨 등이 중심이 돼 나주보통학교(현 나주초등학교) 학생 등 200여명이 일본에 항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같은 해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첫 출발점이 됐다.
 

나주초등학교 45회 졸업생인 최인기 전 국회의원.

◇학교를 빛낸 선배들

숭고한 애국정신으로 한반도의 자존심을 고취시킨 나주초등학교는 이러한 까닭에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들도 여럿 배출했다.

대표적으로 양재봉(나주초등학교 28회) 대신그룹 창업주는 대한민국 굴지 금융그룹인 대신그룹을 설립, 한국 경제 성장의 한축을 담당했다.

김수영(나주초등학교 34회) 전 단국대학교사회과학대학교 학장은 한국 정치학계 큰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최인기(나주초등학교 45회)전 국회의원은 행정자치부 장관, 광주직할시장, 농림수산부장관 등을 주요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국가와 지역 발전에 이바지 했다.

이밖에도 박인천(제 11회 명예졸업)금호아시아나 그룹 창업주는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하긴 했지만 나주초등학교 출신으로 금호그룹을 국내 굴지 대기업으로까지 성장시킨 인물이다. 지역을 넘어 한국 경제를 일으킨 주역이었다.
 

나주초등학교의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는 상징 및 교가 알림판이 벽에 걸려있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현재의 나주초등학교

나주초등학교는‘학생이 주인인 행복한 학교 구현’이란 기치 아래 전교생 479명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 정책을 마련해 운영 중이다.

특히 독서·토론 등을 중심으로 한 ‘특색교육’과 ‘기초기본학력’ 증진에 집중하고 있다.

우선 각 학년별 독서 교육을 통해 창의성을 키우는데 힘을 모으고 있다. 독서 후엔 퀴즈 등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금 내용을 상기하고 독서의 재미를 배양한다.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학생 스스로 생각을 표현하고 이를 다른 친구들과 공유하는 기회의 장도 마련했다. 기초학력 전담교사제를 운영해 학생들의 학력 증진에 나서고 있다.

또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를 가질수 있도록 학생 수준에 맞는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영어·수학 등 상대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과목들은 방과 후 선생님과 학생이 1:1 지도가 될 수 있도록 교육 커리큘럼을 짰다. 정서불안 등 학교 안에서 해결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위한 학습종합클리닉센터도 별도 운영 중이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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