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크게 수모를 당할 뻔한 김인자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러모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생판 모르는 객지 건달놈들에게 몸을 망치는 것은 그녀 일생 일대의 수치가 되고 수모가 되고, 밍신이 된다. 그럴 바에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 목포에서 서울 올라올 때, 말없이 차표 끊어주고, 계란 한 꾸러미, 껌 한통, 그리고 김밥 두 줄을 사주며 전송한 그를 외면할 수 없다. 순박하고, 어딘가 마음이 빈 듯 공허한 바람을 일으키는 분위기가 있는 청년. 그를 잊을 수가 없다. 그라면 인생을 걸어도 좋다. 그녀는 곧바로 책상에 앉아 두려움없이 길게 편지를 보냈다.

-오성공씨, 보고 싶어요. 객지에 산다는 것이 이렇게 외롭고 슬프고 모멸의 나날이라는 걸 아니까 당신이 더욱 그리워져요. 아무래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이에요. 나를 생각한다면 편지 받은 즉시 서울로 올라와요. 서울에서 야망을 달성해요. 마침 길 건너편 언덕받이에 빈 집이 있어요. 이 집 누가 들어올까 걱정이에요. 수리해서 쓰면 들어가 살만하니까 빨리 올라와요.

이렇게 해서 올라왔는데, 그는 당분간 김인자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몽둥이를 들고 배웅하는 일부터 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었다. 소문에는 경찰의 불량배 집중 단속에 동네 건달들이 일망타진되어 잡혀들어갔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경찰을 피해 모두 도망을 갔다고 했다.

어느날 김인자가 오성공을 항해 말했다.

“이제 내 걱정은 말고, 기울어가는 판자집 수리해요. 이 동네는 우탁투탁 못질해서 쓰러져간 판자집을 세우면 내 집이 되는 동네예요.”

달동네 판자집들은 지방에서 괴나리 봇짐 싸들고 올라온 사람들의 주요 거처지였다. 서울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산비탈이나 천변에 닥지닥지 판자집들이 늘어선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오성공은 김인자의 지시를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언덕빼기의 기울어져가는 판자집을 허물고, 브로크 벽돌로 새 집을 지으니 쓸만한 신혼집이 되었다. 계곡에 붙은 북편쪽이라 집이 어두웠지만 부엌 하나에 방 두 칸 집이 마련돼 거처할만한 곳이 되었다.

집은 순전히 오성공과 김인자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투입되었다. 열아홉 살의 처녀가 몸뻬 차림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판자조각을 머리에 이어나르고, 브로크 벽돌 다섯 장, 여섯 장씩 이어날라 시멘트를 모래에 섞어 물에 이기는 오성공에게 갖다 주면 차곡차곡 집 벽을 쌓았다.

“데모도 일이 쉽지 않당깨. 천천히 브로크 가져와.”

오성공이 힘에 겨워서 한 소리 해도 김인자는 묵살하고 부지런히 브로크 벽돌을 날랐다. 그렇게 해서 지은 집인지라 두 사람은 완성된 집을 볼 때마다 그지없이 뿌듯하고, 행복했다.

“서울특별시에 열아홉 처녀 총각이 어엿하니 마이 하우스를 만들어버리고만이.”

고향 사람들이 오면 집부터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김구택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김인자가 술상을 차려 두 사람 앞에 놓고 말했다.

“서울은 기회의 땅이에요. 비탈진 땅에 집을 지어도 내 집이 돼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셋방을 살아요. 여기 판자집에도 셋방살이하는 공장 직공들, 행상들, 실업자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이 비탈에 하꼬방 지으면 바로 내 집이 되는데, 왜 셋방을 살죠? 발상의 전환을 못해서 그래요. 시청에서 단속 나와 판자집을 철거하면 딱지 받아 아파트 분양권을 받을 수 있잖아요. 헌데 성공씨는 옆집 오씨 말을 듣고 말죽거리로 나가 회계 일을 보면서 배에 잔뜩 헛바람이 들어버렸어요.”

오성공이 소줏잔을 입에 털어놓고 받았다.

“영 맨, 투비 앰비셔스(young man, to be ambitous)라고 하지 않았가니? 그래서 따라간 것이여. 한탕 하는 곳잉깨. 야망은 청춘의 특권이여.”

오성공이 동성동본이라는 오씨를 따라 말죽거리로 나간 것은 젊은이 야망 때문이란 뜻일 것이다. 김인자가 오성공을 흘겨보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복마전 같은 곳에서는 헛된 꿈이 있을 뿐이다. 뿌리없는 인생들의 망상만 존재하는 것이다.

“성공씨, 정신 차려요. 그래 가지고 성공씨 자기 이름대로 성공할 수 있겠어요?”

김인자는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재사들과 피복공장에서 땀을 흘리는 직공들을 보면서 오히려 그들에게서 꿈과 희망을 보았다. 그들은 하루 열다섯시간씩 일을 하며 2-3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폭압적인 노동과 살인적인 박봉인데도 그들은 꿈을 품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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