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위해서라면 어떤 궂은 일도”…전쟁 아픔 딛고 키워가는 ‘코리안 드림’
전쟁발발 후 500여명 광주 도착
대부분 여성·자녀 등 가족단위
살기 위해 집·논밭 버리고 피난
4평 방서 2~3명씩 살며 적응 중

성인들 공장·식당 등 일용직 취업
현지 남은 가족 안위에 근심 ‘가득’
전쟁 참상 보고 실어증에 외출공포도
‘기회의 땅’ 광주서 새 희망 키워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전쟁을 피해 광주에 온 김네닐라(맨왼쪽) 가족 및 여동생 가족 9명이 일요인인 지난달 31일 광산구 월곡1동 한 원룸에 모여 한국사회 적응과 정착 의지를 보여주는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지난 5월 12일 광주에 도착한 네닐라씨 가족 중 성인들은 하남산단에 있는 중소기업에 일용직으로 취업해 ‘코리안 드림’을 향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고려인 집거지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1·2동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후 광주는 물론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이다. 고려인마을 주민과 월곡동 주민들, 광주시민들의 십시일반 모금으로 마련한 항공료 지원을 받아 매일같이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3일 현재 전쟁이후 광주에 온 고려인 난민은 500여명이다. 3월 최마르크군 입국 이후 4개월 여동안 매월 100명 가량 도착했다.여성과 노인, 어린 자녀들이 대다수다.

광주에 온 고려인 난민들은 대부분 광산구 월곡 1·2동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있다. 월곡1·2동은 2000년대 초부터 고려인들이 모여살면서 현재는 7천여명이나 된다. 이 지역이 일명 ‘고려인마을’로 불리는 이유다. 고려인들은 (사)고려인마을(고려인마을)을 결성해 공동체 생활을 한다. 고려인마을은 출입국 관리, 비자 갱신, 취업 및 주거 알선 등 한국사회 적응을 위한 종합서비스를 제공하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를 비롯 진료소, 아동센터, 어린이집, 법률상담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FM라디오방송을 하는 GBS고려방송국과 청소년문화센터, 월곡고려인문화관 등도 있다.

고려인들이 생면부지의 땅에서 적응하고 정착할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헌신적인 활동가들과 시민들의 따뜻한 인간애,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기업, 관공서 등의 지원도 뒷받침된다. 고려인 난민들로선 새 희망을 꿈꾸는 기회의 땅인 셈이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광주 광산구 월곡2동에 위치한 ‘고려인 광주진료소’와 ‘월곡 고려인문화관 결’ 모습. 월곡1·2동은 20여년전부터 고려인들이 모여살며 자생적인 공동체를 형성해 우크라이나 전쟁난민 고려인 동포들에게 기회의 땅을 제공하고 있다.

◇낯설지 않은 기회의 땅 광주

고려인마을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천영 목사(새날학교 교장)는 “광주는 고려인을 비롯한 이주민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정착하는 데 필요한 자생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스스로 20년 이상 고생하면서 구심점을 만들고 각종 지원 시설 기관을 구축하고, 운영도 직접한다” 면서 “필요하고 부족한 게 있으면 서로 서로 연락해서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를 형성했다. 경기도 안산이나 인천, 경주의 고려인 거주지와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점이다. 광주만의 독특한 사회적 자본이 형성돼 있어 고려인 난민들이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곳’이 광주다”고 설명한다. 고려인들은 또 한국말을 전혀 못해도 같이 러시아어를 사용하다보니 고려인마을에선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려인 난민들에겐 광주는 분명 처음 밟아보는 땅이다. 적응과 정착을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주거와 일자리, 자녀 교육, 언어 등이 대표적이다. 전쟁 트라우마 치유도 필요하다.

전쟁발발 이후 광주에 온 고려인들은 대부분 원룸에서 생활한다. 가족이나 친척, 지인 등이 어느정도 기반을 잡은 상태에서 입국한 고려인들은 사정이 낫겠지만, 그렇지 않은 고려인들로선 4~5평 규모의 한 칸 방에서 어른 2~3명이 함께 지낸다. 고려인 난민들이 가족단위로 입국하는 데다, 주거비용을 최대한 아끼려고 좁은 방에서 여러명이 모여 산다.

지난 5월 12일 두 명의 여동생 식구 등 9명이 함께 입국한 김네릴라(54) 씨 가족은 월곡1동에서 원룸 3개를 얻어 9명이 기거한다. 그들이 사는 원룸은 4평 규모로 어른 3명이 누우면 빈 공간이 없을만큼 좁다. 우크라이나를 떠날때 들고 온 옷가방 등이 놓여 있어 더욱 좁게 느껴진다.

작고 불편하지만 소중한 보금자리다. 쉬고 잠자면서 내일을 꿈꾸는 공간이다. 광주에 온 고려인들 중 성인들의 경우 노약자와 환자 등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 취업을 한다.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알선한 하남공단·평동공단의 중소기업과 식당 등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한다.

11살·13살 두딸과 5월 중순 한국에 온 김 테찌아나(38)씨는 삼성전자 광주공장 협력업체에 2개월째 출근하고 있다. 그가 맡은 업무는 냉장고 조립 분야다. 우크라이나에서 식품점에서 야채포장 일을 한 그는 생전 처음 접한 공장생활과 부품 조립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광주고려인마을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고려인마을에서 운영하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상담실 모습. 신조야(오른쪽) 고려인마을 대표가 전쟁을 피해 광주에 온 고려인들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태어나서 처음 공장 일해

테찌아나씨는 “한국에 와서 한번도 안해본 일을 하다보니 처음엔 많이 힘들었다. 지금은 많이 적응했다”면서 “휴가철 때문인지 일이 별로 없다.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고려인들은 이산가족 아픔 속에 있다. 태어나고 살았던 우크라이나와 그곳에 남은 가족들 생각에 근심이 떠나질 않는다.

문 놀레나(23)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부모와 남동생을 두고 이모를 따라 혼자 한국으로 왔다. 놀레나씨는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우크라이나 집에 가서 예전처럼 엄마와 아빠, 동생이랑 다시 함께 살 수 있길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광주공장 협력업체서 일하는 그는 틈나는 데로 SNS를 이용해 부모와 친구들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향수를 달래고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고려인들은 그나마 다행이다.

상당수 고려인들은 전쟁의 잔인함과 처참함에 큰 상처를 입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든 상태다. 안 엘레나(41)씨는 직접 겪은 전쟁 후유증에 지금도 건물밖을 나서는데 두려움을 갖고 있다. 광주에서 살다가 비자갱신차 지난해 1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던 엘레나씨는 얼마되지 않아 전쟁과 맞닥뜨렸다. 매일 러시아군의 공습이 이어지고, 포탄 파편이 날아들면서 그녀의 부모와 딸이 살고 있었던 집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목숨만 건진게 천만다행이었다. 공습은 계속됐다.

그와 가족들은 지하실로 피신해 20일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제대로 먹을 것도 없었다. 지하실에 흘러들어오는 물로 생명을 부지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사던 집과 논밭을 모두 버리고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올랐다. 그와 가족들은 폴란드를 거쳐 광주에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수시로 생각나는 공습과 폭격, 지하실 생활 때문이다. 차량 경적소리만나도 깜짝 깜짝 놀란다.

그의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하다. 청각장애를 지닌 딸은 다리까지 아프다. 폭탄 폭발음으로 청각장애는더 심해져 수술을 받을 수 없을정도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야 하지만 전쟁 후유증과 연로하고 아픈 가족들을 돌보느라 일을 못하고 있다.

엘레나씨는 “안전한 한국 땅에서 온 가족이 살 수 있는 것은 좋지만 걱정도 많다”면서 “내가 빨리 (돈을)벌어야 세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 고려인마을 도움으로 지금은 많이 안정됐다. 조만간 일터로 나갈 생각이다”고 말했다.
 

광주거주 고려인들의 한국사회 적응 및 정착을 위해 출입국 관리, 비자 갱신, 취업 및 주거 알선 등 종합서비스를 제공하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 외부 모습.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전쟁트라우마 안고 한국 적응 도전

전쟁의 아픔과 상처는 아이들에겐 더 크게 남았다. 올해 11살인 고알레그는 어머니를 따라 나선 피난길에서 사람이 포탄에 맞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된 광경을 목격하곤 그 충격에 실어증에 빠졌다.

이처럼 전쟁을 피해 광주에 온 우크라아나 고려인들은 짧게는 한 달전, 길게는 5개월전만해도 전쟁의 한 복판에 있었다. 지하실에 피해있기도 힘들어 택한 것이 결국 피난이었다. 남의 나라인 폴란드, 루마니아 등에 도착해서는 열악한 수용소에서 가슴 졸이며 하루 하루 불안에 떨었다.

그들에게 희망의 손을 내민 곳이 한국이었고, 광주였다. 고려인마을이었고, 광주시민들이었다. 십시일반한 성금으로 마련한 항공권을 보내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고, 광주에 도착했다.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공포에 떨었던 순간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저마다 크고 작은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그들은 ‘조상의 땅’에서 새로운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 전쟁이 없는 평화의 땅에 왔으니 어떻게든 열심히 일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꿈이다. ‘코리안 드림’이다.

엘레나씨는 “어머니와 딸이 우선 건강을 되찾고 모두 더 건강해지면 좋겠다. 이후에 딸이 국적도 얻고 일하며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게 꿈이다”고 전한다.

테찌아나씨는 두 딸이 할아버지 땅에서 성공하도록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광주에 와서 좋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잘해주고, 공장 식구들도 따뜻하게 대해준다”며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더 큰 집에서 살고 싶다. 두 딸이 한국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며 간절함을 보인다. 평화의 땅 광주에서 부르는 고려인 동포들의 희망가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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