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 후손 고정주 선생 설립
월봉산 상월정서 1906년 출발
창흥의숙 거쳐 116년 역사 자랑
지역 최초 영어 등 외국어 교육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이한기 등
우리 근·현대사 주역 다수 배출
한때 3천명 넘던 학생 70여명으로 줄어
의미있는 배움 통해 새로운 항해

 

1906년 4월 1월 개교한 담양 창평초등학교는 영학숙-창흥의숙 등을 거치면서 호남 근대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인촌 김성수를 비롯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심강 고재욱, 이한기 전 총리, 고재필 전 국회의원 등 우리 근현대사의 수많은 주역들을 배출한 명문 교육기관이다. 사진은 창평초등학교 전경.
담양/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월봉산 바라보는 기름진 땅에

금성냇 흐른 물로 마음을 씻어

착하고 어진 뜻을 밝혀나가는

드높다 우리학원 창평교라 하네”

담양 창평초등학교 교가 가사다. 작사·작곡 미상의 교가에는 창평초가 위치한 지역의 특성과 교육 방향이 담겨있다. 월봉산은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와 대덕면 운암리 경계에 있는 산(해발 454m)으로 호남정맥 만덕산 서편을 마주보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창평면 소재지 일대가 내려다보이고, 남서쪽 기슭에 상월정이란 암자가 있다. 금성냇은 금성산에서 발원한 삼지내를 의미한다고 한다. 창평초가 있는 곳이 삼지내 마을로 불리는 연유다.

상월정은 창평초의 출발지다. 예부터 8~9명이 거주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부터였다. 고려 초기인 경종 1년(976)부터 언양 김씨 일가에서 공부방으로 이용하던 암자인 ‘대자암’을 조선 초기인 1457년 언양 김씨인 강원감사 김응교가 ‘상월정’이라 바꿨다. 언양 김씨가 400년, 1500년대 손자사위 이경이 물려받아 함평 이씨가 300년, 이후 대가 끊겨 외손인 고씨 학봉파가 물려받아 활용했다니 무려 1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공부터다.

구한말 상월정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 인재를 키우는 산실의 역할을 했다. 규장각 직각(국립중앙도서관장)과 왕자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황자전독, 의친왕 이강 공의 비서실장을 지낸 춘강 고정주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노들의 처벌과 조약의 조인거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창평으로 내려왔다.

◇신학문 깨우쳐 나라 구한다

고정주는 비록 늦었지만 신학문을 깨우쳐 나라를 구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집안의 정자인 상월정에 1906년 ‘영학숙’을 세운다. 이름은 외국어를 배운다는 뜻으로 ‘영’자를 넣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해 서울에서 원어민을 초빙해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호남지역 근대교육 토대를 마련했다.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함께 의병장으로 나서 순국한 제봉 고경명의 후손이다.

영학숙은 1906년 개교한 광주 서석초등학교 전신인 광주보통학교와 시기를 같이한다. 광주·전남에서 중학 교과과정에서 처음 영어를 가르친 숭일학교가 문을 연 게 1907년이다. 영학숙은 숭일학교보다 먼저 영어를 가르친 셈이다.

영학숙에서는 수많은 인재가 길러졌다. 고정주의 아들 고광준과 사위 인촌 김성수를 비롯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등이 공부했다. 동문수학한 이들은 광복 전후 나라를 이끄는 한국 민족주의 우파로 성장한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했고 제2대 부통령을 지냈다. 송진우는 중앙학교 교장과 한민당 수석총무를,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고정주는 훈시에서 “고리타분한 선비가 되지 않도록 하라. 반드시 고금과 사리에 통달하여 시무를 훈련하고 얻은 연후에 쓸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옛 것에 집착하고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바로 구차한 선비가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두마리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의 창평초 교기에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창평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고 성장해 세상을 밝게 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창평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석탑. 창평초 116년 역사의 상징물인 이 석탑은 창평초 출발진 월봉산 암자인 상월정(영학숙)에 있었으나 당시 창평 객사가 있던 용주관에 창흥의숙이 들어서면서 상월정에서 옮겨왔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창평초등학교 옛 모습.
창평심상소학교 시절인 1939년 창평초등학교 제28회 졸업생 기념사진.

◇창평을 흥하고 의롭게

그러나 ‘귀족들의 학교’라는 한계에 부딪혀 영학숙은 운영 2년만인 1908년 4월 1일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변신해 새로운 출발을 한다. 개교기념일 4월 1일도 여기서 출발한다.

당시 창평군 객사인 용주관에 배움터를 마련한 창흥의숙은 180여평의 건평에 교실 6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 11월 23일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소실돼 현재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목조건물은 불로 사라졌지만 창흥의숙이 만들어질때 용주관으로 가져왔던 상월정 석탑 중 일부가 창평초 교정 한켠에 서 있다. 이 석탑은 올해 개교 116년인 창평초 역사의 상징물이다.

학교가 불타자 지역인들은 창평상회 건물을 임시학교로 개조, 사용할 정도로 인재양성에 열의를 보였다. 창평초의 현재 부지는 이 용주관 터를 확장한 것이다. 용주관이 있던 자리는 교문 옆 팔각정과 100주년 기념탑 등이 들어서 있다.

창흥의숙은 1909년에 ‘창흥학교’로 이름이 바뀐다. 당시 교장은 고정주, 교감 이병성, 교사는 일본인 한 사람이었다. 학생수는 50명 정도였다. 초등과는 3년, 고등과는 6개월 속성으로 교육했다. 교과목은 한문, 역사, 영어, 산수, 지리 등 주로 신학문을 가르쳤다. 창흥학교는 1911년 ‘창흥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가 다시 ‘창평국민학교’로 바뀐다. 지금의 창평초 이름은 1996년 3월 1부터 불리게 됐다.

이렇듯 창평초는 담양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구한말, 근현대사 애환을 모두 간직하며 성장해와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호남에서 신교육의 선구적인 역할과 민족운동교육의 한줄기를 형성하고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명문 교육기관이다.

창평초의 남다른 건학 배경에 창평지역은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들이 뿌리내기 어려울 정도로 독립운동과 나라사랑, 민족애가 강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도 활발했다. 교육의 힘이 지역민의 기질로 승화돼 창평의 정서를 형성하고 뿌리내리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창평이 인재의 고장, 의를 추구하는 고장, 교육을 통한 발전,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고장으로 불리는 배경이다.

창평초등학교 설립자인 춘강 고정주 선생 초상.
2006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창평초등학교 역사관 내부 모습. 설립자 고정주 선생 흉상 등 다양한 우리나라 근현대사 교육자료를 보관하고 있다./임문철 기자
창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탑

◇2006년 100주년 기념식 개최

창평초는 지난 2006년 4월 개교100주년를 맞아 1세기 학교역사를 담은 역사관과 기념비 건립, 기념책자 발간 등 기념 행사를 가졌다. 기념행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동문 1천여명이 참석해 창평초교 재도약 원년 선포식 등을 진행했다. 학교 본관 맞은 건물 1층에 마련된 역사관에는 학교 설립자 고정주 선생 흉상과 칙령, 졸업생 사진, 졸업장 등 학교의 소중한 100년 역사와 교육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창평초는 작년 12월 17명의 110회 졸업생까지 116년의 역사를 써오면서 총 8천656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졸업생 중에는 앞서 거론한 인물 외에 심강 고재욱, 이한기 전 총리, 고재필 전 국회의원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인재도 많다.

창평초 탄생과 성장이 일제 강점기에 탄생하고 수많은 우국지사를 배출한 시대의 흐름상을 반영했듯이 현재는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의 한복판에 있다. 한때 3천명을 넘던 학생수는 100명도 채 안된다. 국내 농어촌 학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넓은 운동장과 길다랗게 이어진 교사, 교정에 곳곳에 자리한 크고작은 수목들이 과거의 수많은 동량들이 공부했던 학교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김형옥 창평초등학교 교장.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육, 수업혁신 등을 통해 새로운 100년을 향한 인재육성에 앞장서고 있다.

◇고장·학교 알기 특색교육 ‘눈길’

비록 규모는 예전같지 않지만 창평초는 ‘의미있는 배움을 통하여 성장을 경험하는 학교’를 비전으로 ▲독서를 통한 문해력 교육 충실 ▲자율과 협력의 학생 자치문화 활성화 ▲전문적인 학습공동체 운영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육 ▲수업혁신을 추구하며 새로운 100년을 향한 힘찬 항해를 하고 있다.

특히 학교가 소재한 창평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한 지역사회 교육을 다양하게 운영한다. 매년 학년별로 ‘고장 탐방’ 추진이 대표적이다. 고장내 12곳을 정해 학생들이 직접 찾아가 체험활동을 하면서 고장과 학교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긍지를 갖도록 한다. 1~2학년은 마을 걷기와 창평 향교, 3~4학년은 월봉산 등반과 상월정 탐방, 5~6학년은 일제강점기 의병장인 녹천 고광순 고택과 전시관, 종갓집 방문 등을 진행한다.

여기에 6학년의 경우 일제강점기 창평인들의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보여준 ‘모해를 찾아서’ 책을 프로젝트 수업으로 진행한다. 당시 공간적 배경이 된 ‘창평상회’가 있던 사걸리와 창평오일장, 면사무소, 상월정 등을 조사해 고장의 항일의병 운동을 살펴본다.

김형옥 창평초 교장은 “창평초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길 백척간두의 상황에 교육을 통한 구국의 일념으로 개교했다”면서 “이같은 건학정신을 바탕으로 교직원들은 학생들이 선배들의 빛나는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인재 육성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담양/김명식·이경신 기자 msk@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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