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5월 태동 116년 역사
학생 14명 신학문 교육 시작
1909년에 옥과 객사에 둥지
뒤틀린 연혁 동문들 바로잡아

6·25전쟁때 배움터 모두 소실
제각·대밭·산·하천가서 공부
지역민들 학교 짓기 운동 전개
“새로운 100년 향해 힘찬 걸음”

 

전남 곡성군 옥과면 소재 옥과초등학교는 구국교육운동 일환으로 1906년 5월 1일 설립된 ‘사립 양영학교’를 모태로 올해 개교 116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사진은 ‘개교 백주년’ 기념석과 옥과초등학교 건물 전경. 곡성//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전남 곡성군 옥과면은 교육의 고장이라 불린다. 농촌지역 면단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있다. 초·중·고에 이어 대학이 있는 면 지역은 국내에선 찾기 힘들다. 옛부터 옥과 향교가 들어설 만큼 교육열이 높았던 게 배경이다. 그 중심에 옥과초등학교가 있다. 옥과초는 1906년 5월 1일‘사립 양영학교’(양영학교)로 출발해 올해 116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 조민호 면장 ‘죽림서당’에 설립
양영학교의 태동은 구한말 우리나라 상황과 궤를 같이한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로 우리나라(조선)의 국권이 박탈당하자 반일 감정의 열기가 고조됐다. 또 민족자강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계 지도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구제하는 길이 바로 교육이요, 그 교육은 오직 사립학교에서만 성취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관·공립학교는 일제에 악용되기 쉬우나 사립학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돼 민족계 지도자와 선각자들이 주체돼 구국교육운동의 일환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에 당시 옥과군 군내면장이던 조민호씨는 옥과면 죽림리 최정근씨 사랑채에 운영되던 ‘죽림서당’에 14명의 학생을 모아 ‘사립 양영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양영학교는 1909년 9월 2일에 옛 옥과군 객사 건물인 설산관에 이전, 학교다운 면모를 갖추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영학교 이름은 “신학문 교육으로 뛰어난 인재를 기른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옥과초등학교 전신인 사립양영학교의 1910년 모습./옥과초 역사관 소장

◇ 고종 지시로 설산관으로 이전

양영학교가 설산관으로 옮기게 된 건 고종의 뜻이 반영됐다.

고종은 1907년 4월 1일 관보를 통해 “오늘날 급선무는 교육보다 더한 것이 없다. (중략)학생들을 교육하는 조건에서는 늘 궁색한 것이 걱정인데 무엇보다 넓고 큰 건물들을 갑자기 도처에 짓기가 곤란하다. 여러 군들에 있는 객사 건물에는 궐패를 둔 것 외에 아직 큰 칸들이 많으며 사신들이나 손님이 들어본 일이 없는데 전부 내버려두어 무너지고 있으니 아무런 의의가 없다. 이제부터 모두 잘 수리하여 교사로 만들고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게 공문을 만들어 각 해당 도의 관찰사들에게 알려줄 것이다”고 밝혔다.

나라의 급선무인 인재 양성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객사를 수리해 교육시설로 활용하라는 지시였다. 고종의 뜻에 따라 양영학교는 설산관을 수리해 옮기게 된다.

양영학교는 설립후 6년 7개월동안 민족의식과 독립을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16년 4월 1일자로 양영학교는 ‘사립 옥과보통학교’로 총독부 인가를 받아 일제의 제도권으로 들어간다. 이듬해인 1917년 4월 23일 ‘옥과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뀐다.

김성규 교장이 1973년 3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을 증명하는 1910년 사립 양영학교 임원 명부./옥과초 동문 김형수씨 제공

◇곡성군지 편찬과정서 연혁 오류

그런데 현재 전남도교육청을 비롯 각종 행정관청 기록에는 옥과초는 양영학교가 설산관으로 옮긴 1909년 9월 2일이 출발점으로 돼 있다.

옥과초 동문과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잘못된 기록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94년 곡성군이 ‘국역 곡성군지’를 간행하기 위해 1918년에 편찬된 정수태의 ‘사찬 곡성군지’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립 양영학교’를 ‘사립 육영학교’로 잘못 기록한 게 원인으로 꼽는다.

또 객사를 수리해 교육시설을 활용하라는 고종의 뜻에 따라 설산관에 둥지를 틀었기에 이를 기점으로 삼은 것으로도 해석한다.

이런 연유로 옥과초와 총동문회는 지난 2011년 ‘옥과초등학교 100년사’를 발간하면서 그 시기를 1909년부터 2009년까지 삼았다.

옥과초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종민씨의 곡성중앙초 제출 이력서. 1907년 사립양영학교 일어교사 근무 기록(붉은색 표시)이 있다./옥과초 동문 김형수씨 제공

◇100년사 편찬 후 새 자료 발견

동문들은 100년사 발간 이후 옥과초의 첫 출발시기와 장소가 1906년 5월 1일 죽림서당 이라는 자료를 발견한다. 이종민(1886년생) 교사가 곡성 중앙초 근무를 위해 제출한 이력서에 1907년 사립 양영학교 일어교사로 근무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또 김성규(1915년생) 전 교장이 1973년 3월 9일자 전남일보에 아버지 김일남씨와 장인 박종범씨의 전언을 토대로 ‘옥과초의 출발은 1906년 5월 1일 죽림서당이다’고 인터뷰 기록도 발굴했다.

김일남씨는 1910년 양영학교 임원이었다. 박종범씨는 당시 양영학교 교감이던 박선교씨의 아들이다. 박선교씨 역시 1910년 김일남씨와 양영학교 임원으로 활동했다. 김성규 교장은 아버지와 장인을 통해 어린시절부터 양영학교의 출발을 들었다고 한다.

여기에 곡성중앙초등학교가 100년사를 발간하면서 옥과초의 출발이 1909으로 돼 있는 잘못된 것이라고 기술한 점과 양영학교의 설산관 시절 초대 교장이었던 임노준씨가 자신의 시집을 발간하면서 약력에 1907년에 양영학교 교감을 기록한 점도 옥과초 역사 바로잡기의 근거가 되고 있다.

옥과초 역사관 내부 모습.

◇학교동문 역사바로잡기 나서

새로 발굴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옥과초와 총동문회에서는 연혁을 바로잡고자 전남도교육청과 곡성군에 제안을 해놓고 있다. 전남교육사와 곡성군사를 새로 편찬할 때 정정해달라는 뜻에서다.

학교와 동문회 차원에선 1906년 5월 1일을 학교 출발로 인정하고 있다. 체육관인 양영관 현판과 개교 100주년 기념석에 ‘1906년 5월 1일’이 옥과초의 출발점이라는 걸 새겨놓았다. 개교기념일도 설산관 시절인 9월 2일에서 5월 1일로 바꿨다.

옥과초의 연혁 혼돈은 나약해진 국가가 야기한 혼란스런 사회분위기가 배경이다. 졸업기수에서도 잘 나타난다. 옥과초는 올해까지 103회 졸업식을 치렀다. 1회 졸업생이 배출한 시기는 1918년이다. 양영학교가 일제에 의해 ‘옥과공립보통학교’로 바뀐 이듬해다.

‘옥과초 100년사’에 1910년 1월 양영학교의 1회 졸업생이 배출된 기록이 있지만 옥과초 졸업생과는 별도 분류해놓고 있다. 일제에 의한 보통학교 설립을 옥과초 설립의 원년으로 삼고 있어서다. 이로인해 오랜기간 개교기념일도 보통학교 로 이름이 바뀌었던 4월 23일이었다.

옥과초등학교 체육관인 ‘양영관’. 사립양영학교의 뜻을 이어가기위해 양영관으로 이름지었다. 입구 왼쪽 벽에는 ‘양영관’ 유래와 의미가 적힌 현판이 있다./임문철 기자
양영관 설명 현판.

◇6·25로 학교 건물 전체 소실

이처럼 옥과초는 1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숱한 애환과 부침을 겪었다. 6·25전쟁때는 패퇴하던 북한군의 방화로 설산관과 부속건물이 전소해 양영학교 설립부터 당시까지 모든 학사 자료와 기록들이 함께 소실됐다. 전쟁이 끝난 뒤 국가기록원에 학적부 등이 남아있어 졸업생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온전하지는 않았다.

하루아침에 배움터가 불에 타 사라졌어도 배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창녕조씨 제각과 옥과 향교 뒷동산, 죽림리 대밭옆, 성황당(일명 사랑당), 옥과천변, 개인집 광마무와 사랑채 등을 교실로 이용해 배움을 계속했다.

학습장은 학년·반별로 이곳 저곳 흩어져 수업이 이루어졌고 심지어 교사의 자취방에서도 진행됐다. 이런 배움터는 임시 가교사가 지어지기까지 1년여동안 계속됐다.

임시 가교사는 옥과 지역민의 모금운동과 울력으로 지어졌다. 지역민들은 전소된 교사를 건립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구련회’와 주민들은 찬조와 희사금으로 옛 관서당이 있던 일대의 논과 밭, 산을 매입하고 터를 닦아 나무 기둥에 벼짚을 지붕으로 덮은 임시가교사를 만들었다.

옥과초등학교 교내에 설립된 ‘옥과초 역사관’ 내부 모습. 역사관에는 학교 연혁과 각종 교육자료, 졸업사진, 역대 졸업생 명단 등이 전시돼 있다./임문철 기자

◇지역·국가발전 견인 인재 배출

우리 근현대사 애환과 시련을 함께 해오면서도 옥과초는 지역과 국가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올해 1월 7일 열린 제 103회 졸업식에서 29명 졸업하는 등 총 1만 1천71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김대자(종현15회) 내무부장관, 박형석(30회) 교수, 이금원(30회) 판사, 임일남(30회) 남부대 총장, 오창수(39회) 광주대학교 대학원장, 김형수(46회) 향토연구가, 박상환(50회)㈜하나투어 회장, 서용길(50회) 서용길외과원장, 권희석(51회) ㈜하나투어 대표이사, 허성균(52회) 곡성교육장 등이 ‘옥과초 100년사’에 모교를 빛낸 인물로 수록돼 있다.

옥과초는 한 해 졸업생이 300명에 이를만큼 규모가 있는 학교였다. 하지만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이농과 저출산에 따른 학령감소 여파로 학생 수가 줄면서 현재는 겸면초, 옥수초, 마삼초, 흥산초 등과 통합을 했어도 전교생 196명이 전부다.

이런 사회적 변화속에서도 옥과초는 100년 학교의 자긍심으로 더 큰 백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05년 적정규모 학교 육성사업으로 학교시설을 현대화해 쾌적한 교육환경을 구축, 새롭게 출발했다. 또 2011년 11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가진 데 이어 올해 3월 1일 제25대 교장으로 부임한 강영 교장을 중심으로 68명의 교직원들이 학생들의 꿈과 실력을 기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푸른꿈 알찬실력 바른행동을 키워가는 학교’ 교훈 아래 학생 한 명 한 명이 행복하고 당당한 자존감을 갖춘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특색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강영 옥과초 교장.

강영 교장은 “이 고장 주민과 선배들이 일제강점기와 학교가 완전히 불에 타버린 6·25전쟁 등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옥과초등학교의 116년 역사를 만들어냈다”며 “꿈을 만들며 힘차게 달려온 훌륭한 자취는 새로운 100년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곡성/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