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초당대학교 교수)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목포에서 온 발달장애인들을 안내하고자 5·18기록관과 ‘전일빌딩 245’를 찾았다. 전일빌딩에 박힌 기관총탄은 계엄군의 헬기 기총소사를 증언한다. 우리는 그곳을 주차장으로 만들려 하였다. 역사를 말살하려 한 셈이다. 이러한 몰역사성이 항쟁의 상징인 전남도청을 파괴하고, 이제 그것을 복원한다고 요란을 떤다.

한말 의병 전쟁 50% 이상이 전남에서 일어났다. 전남 의병부대는 2년 동안 350차례 이상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이들의 활약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지연시켰다. 하지만 전남 출신 의병계열로 서훈된 이는 전국 의12.9%에 불과하다. 후손이 끊어졌거나, 입증방법을 모른 탓이다. 전라남도가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미서훈자를 찾는 사업을 하고 있다. 전남지사의 높은 식견에 경의를 표한다.

이 사업의 마중물은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이었다. 이어 나온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학생운동’ 등 모두 ‘한국학호남진흥원(이하 진흥원)’에서 간행하였다. 진흥원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출자하여 세운 재단법인이다.

출범한 지 만 5년에 불과한 신생 조직인 탓에 규모가 같은 성격의 경북 안동에 있는 국학진흥원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흥원은 광주·전남의 많은 고문헌을 발굴하였고, 마한사·독립운동사 등 전라도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에 매진하였다.

지난 9월 22일 진흥원의 개원 5주년 기념식에 갔었다. 수백 년 보관된 고문서를 진흥원에 가장 먼저 기증한 장성 기씨 후손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5년 전에 진흥원 연구자들이 찾아와 고문서를 위탁 기증할 것을 간청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로부터 5년 전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약속을 먼저 하였다. 그때는 진흥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90세 다 된 부친이 기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고문서를 서울로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었기 때문이다. 마침 진흥원이 생기니 부친께서 기쁜 마음으로 민속박물관과의 기증 약속을 파기하고 기증하셨다.” 눈물이 쏟아진다. 전라도 정체성이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 품을 떠난 문화재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최근 기막힌 소식을 접하였다. 개원한 지 5년 된 진흥원은 독립건물이 없이 다른 기관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다. 광주·전남 정체성의 소중함을 안다면 하루빨리 독립건물을 만들어 우리 지역의 역사 연구와 교육의 중추 기관으로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렵게 이 지역에 세워진 진흥원을 전북 부안으로 옮기려 한다. ‘호남’ 진흥원 이름에 걸맞게 전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나 전남에 그 기관이 있으면 ‘통합’이 안 되고, 전북으로 가면 하나의 ‘호남’이 되는 것인가! 만약 부안에 진흥원이 있었다고 하자. 필자가 정말 힘들게 추진한 ‘3·1운동’, ‘학생운동’ 판결문 번역 작업이 가능하였을까? 광주·전남의 지역성을 반영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장성의 기씨 가문처럼 수백 년 유산을 후손이 선뜻 기증을 결심하였을까?

진흥원을 전북으로 옮기려 한 이는 당당히 나와 주장하기를 바란다. 전남도청을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이들이 누군지 다 알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에서 비겁하였기 때문에, 모 정치인처럼 전쟁에 패하여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소리를 백주 대낮에 하는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 부여 역사를 없애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다.

고흥 출신 서민호 의원은 1950년 6월 23일 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여순사건으로 구속된 이들 가운데 억울한 사람이 많다고 재심을 요구하였다. 19명 국회의원 서명을 받아 대표 발의하였다. 당시 여순 사건은 ‘빨갱이’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괜히 나섰다가는 ‘빨갱이’라고 몰리는 세상에, 서민호 의원은 목숨을 걸고 재심을 요구하였다. 역사에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러한 역사의식이 대표적 민간인 학살사건인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밝혀낸 것이 아닌가!

진흥원 이전 논의가 기우이길 바란다. 만약에 밀실에서 그러한 논의가 있다면 당당히 공론에 붙이길 바란다. 누가, 왜 그것을 하려는 것인지 밝히길 바란다. 그리고 역사의 심판을 받기를 바란다. 제2의 ‘도청복원’ 사업의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산, 경남, 울산도 통합논의만 하다 끝났다. 괜한 통합 논의한다고 하면서 좋은 연구기관 날려 보내는 엉뚱한 발상 그치길 바란다. 호남진흥원이 전라도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총본산의 위상에 걸맞는 기관이 되게 하는 데 힘을 기울일 때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