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매천 황현 등 선각자들
설립 주도한 ‘호양학교’가 뿌리
지역민들 전답·현금 출연 운영
민족주의 고취해 항일운동 토대

1999년 폐교 방광초 정신 이어
올해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새로운 100년’ 향해 큰 걸음
“선배들 기상 잇는 인재육성”

 

전남 구례군 광의초등학교는 호양학교와 방광초등학교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한 ‘100년 학교’다. 공식적인 교육기록엔 1920년 11월 25일이 개교일이지만, 뿌리는 1908년 설립된 호양학교에 두고 있다. 사진은 드론으로 촬영한 광의초등학교 전경. 빨간기와 지붕 건물은 ‘100년 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광의초등학교 제동

전남 구례군 광의초등학교는 호양학교와 방광초등학교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한 ‘100년 학교’다. 공식적인 교육기록엔 1920년 11월 25일이 개교일이지만, 뿌리는 1908년 설립된 호양학교에 두고 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온 나라의 민심은 들끓었다. 전국의 선각자들은 나라를 되찾는 길은 오직 국민의 힘뿐이고, 국민이 힘을 가지려면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 민족주의 신학문 운동을 벌였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전국에 5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될 정도로 교육을 통한 애국운동이 뜨겁게 전개됐다.

구례군 광의초등학교는 호양학교와 방광초등학교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한 ‘100년 학교’다. 공식적인 교육기록엔 1920년 11월 25일이 개교일이지만, 뿌리는 1908년 설립된 호양학교에 두고 있다. 사진은 드론으로 촬영한 광의초등학교 전경. 학교로 뒤로 지리산 노고단 줄기가 병풍처럼 서 있다./광의초등학교 제공

◇산촌에 불어온 신학문 열풍

당시 대표적인 신문화 학교는 1907년에 설립된 전남 창평의 창평의숙학회(창평초 전신)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1908년에 설립된 평양의 대성학교다.

산촌인 구례에도 자랑스러운 학교가 세워졌다. 1908년 8월에 문을 연 호양학교(壺陽學校)다. ‘호(壺)’는 방호산(지리산의 다른 이름)을, ‘양(陽)’은 남쪽을 뜻한다. 지리산 노고단 자락 남쪽에 자리한 학교라는 의미다. 학교 뒤로는 지리산 노고단 봉우리 줄기가 병풍처럼 이어져 있고, 앞에는 넓은 구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호양학교는 뜻있는 지역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설립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매천 황현이다.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살고 있던 황현은 당시 외세와 신문물의 유입을 지켜보다가 나라의 멸망을 막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선 서양 학문을 배울 수밖에 없고, 신학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매천을 비롯한 왕석보의 후학들과 지천리의 유지들은 호양학교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매천의 문인들인 박태현, 권석우, 왕재소, 권봉수, 왕수환 등은 교원으로 활동했다. 이중 박태현이 초대 교장, 왕수환은 2대 교장, 왕재소는 3대 교장을 역임했다.

호양학교는 교사 6명이 12년 동안 학생 100여 명에게 지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주 교육내용은 설립 정신에 맞게 항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구성됐다.

호양학교에서 사용한 태극기와 비천상이 선명하게 양각된 학교종과 제1회 졸업생 중에 왕경환의 장남 왕재일(왕수환에게 양자로 감)이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10여 년 동안 수감된 사실 등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광의초등학교 1회 졸업생 기념사진. 1924년 촬영됐다. 광의초는 1920년 11월 4년제 수업연한으로 개교했다./광의초 제공

◇민족주의 고취 교육 일제 탄압

호양학교의 설립과 운영 재원은 주로 지천리 주민들의 전답과 현금 등 출연이 밑바탕됐다. 당시 전남 구례군에 속했던 방광면, 용강면, 고달면(고달면은 1914년 곡성군에 편입) 등 여러 면의 주민 200여명이 돈을 모았다. 설립자금은 720원이었다.

하지만 재정난에 부닥쳤고 교원들에게 급여를 제대로 못 줄 형편이었다. 이에 황현은 직접 ‘재정 등을 지원해 좋은 일을 도모하자’라는 취지의 ‘사립호양학교모연소’를 작성해 지역의 유림과 재력가로부터 부족한 학교 운영기금을 마련했다.

황현은 운영자금 모금 취지를 이렇게 알렸다.

“호양학교 건립의 노고는 진실로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옥을 쪼다 이루지 못한 듯 어린이들을 가르칠 방도가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고, 월급을 못 주게 되니 스승 노릇 할 자가 있겠습니까. 아아! 장차 훌륭한 후손을 남기고자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낯이 두껍다고 욕하지 마세요.” . 호양학교가 극일과 민족의 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을 목표로 주민들이 자발적, 주체적으로 설립하고 운영된 학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른 지역 사립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특징이다. 구례 지역 최초의 신교육 문화의 발상지로서 구례 지역민의 자랑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례 지역민들은 이 호양학교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의 기초를 세웠고 신간회, 금란회 등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광의초등학교는 1908년 8월 매천 황헌 등 선각자들이 민족주의 고취를 위해 설립한 사립 호양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6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지하면 지하마을 본래 자리에 복원된 호양학교 건물과 복원 기념비./김명식 기자

◇구례지역 항일운동 기초 마련

재정난보다 더 힘든 것은 일제의 방해와 탄압이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학교설립을 통한 민족교육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는 대한제국에 압력을 가해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을 제정·공포하게 한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일제는 유화정책의 하나로 1면에 1학교를 설립하는 정책을 편다. 광의면에도 1920년 광의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 이 여파로 호양학교는 광의공립보통학교에 흡수돼 폐교된다. 호양학교는 2006년에 본래 자리에 복원돼 현재는 학생들의 예절 교육 및 정신 교육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의초등학교 100년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방광초등학교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광의면 유지들은 황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호양학교의 맥을 계승하고자 이듬해인 1946년 10월 15일 광의면 수월리에 방광국민학교를 설립한다. 호양학교의 설립 정신이 해방 후 방광초(당시 방광국민학교)로 이어진 셈이다.

법제적으로 호양학교의 후신은 광의초등학교이다. 하지만 광의초가 일제에 의해 세워진 학교라는 점에서 구례 지역민들이 민족 학교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호양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방광초도 농촌인구 감소와 출산율 저하로 취학아동이 급감하면서 결국 1999년 9월 1일자로 문을 닫는다. 53년간의 명맥이 광의초로 넘어간 것이다.

호양학교 동종. 지리산청소년수련원에 전시돼 있다.

◇1999년 방광초 흡수통합

방광초는 폐교됐어도 학교 건물에서 설립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건립된 학교와 달리 교사가 한옥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민족의식의 발로로 볼 만하다. 전통 한옥에 개량식 기법을 적용한 교사는 2004년 12월 31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의미있는 건축자료다. 현재 이 건물은 청소년 수련원으로 활용중이다.

방광초는 ‘호양학교 동종’에 의해 그 가치를 더 인정받는다. 구례군과 구례군지역교육청 등에 의하면 호양학교가 폐교되면서 동종도 함께 사라졌다. 해방이후 방광초가 설립되자 이때 다시 호양학교 동종을 누군가 찾아와 방광초교 교장실에 보관했다고 한다.

26년 만에 동종을 찾게 된 사연은 ‘시장에 판매된 동종을 주민들이 다시 사왔다’, ‘누군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각종 설이 분분하지만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동종은 방광초교가 1999년 폐교되면서 다시 구례교육청으로 옮겨졌다. 지난 2013~2017년에는 순천대가 잠시 보관해오다, 현재는 구례 지리산역사문화관에 전시돼 일반인에게 공개중이다.

동종 중앙 표면에는 태극기 문양 2개가 선명하게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윗면에는 조각된 용이 있다. 호양학교의 교육운동이 자주독립국을 지향한 민족의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호양학교 설립자들의 애국정신과 민족의식이 읽힌다.

이처럼 광의초는 호양학교에 뿌리를 두고 방광초의 역사를 함께 이어오고 있다. 따라서 학교 출발이 현재의 1910년이 아닌 호양학교가 설립된 1908년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일부 동문들을 중심으로 연혁 바로잡기가 진행중인 것도 이 때문이다.

광의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리는 ‘호양 역사관’에 마련된 방광초등학교 역사관. 호양학교 정신을 잇는 학교로 알려진 방광초등학교는 학생수 감소로 1999년 광의초등학교로 흡수통합됐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학교 연혁 바로잡기’ 진행

광의초 동문(47회 졸업생) 문수현 순천대 강사(문학박사)는 “일제의 불법 강제 국권 침탈로 불가불 호양학교를 운영할 수 없었는데, 해방 후 방광초가 그 정통을 계승했다. 그리고 방광교를 흡수 통한 것이 광의교이므로, 광의교가 호양학교의 정통을 이어받은 학교다는 주장은 모순이거나 무리가 아니다”고 말한다.

이렇듯 광의초는 구한말부터 110여년을 이어왔다. 지금은 지역사회와 국가의 초석이 되는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우뚝 성장했다. 광의교는 전교생이 1천명을 넘나들 정도로 면단위에서 제법 규모가 큰 학교였다.

한 학년 학생수가 가장 많을 때는 52회(1975년) 졸업생이 207명이었다. 63회(73명·1986년)부터 졸업생이 100명 미만으로 줄어들다가 25년 후인 88회(2011년·8명)부터는 한 자릿수를 보이고 있다.

광의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석. 지난 10월 8일 열린 100주년 개교기념행사때 제막식을 가졌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1920년부터 2020년까지 100년동안 광의초를 졸업한 학생은 6천500명이다. 이후 2년동안 15명이 더 졸업해 올해 1월 99회까지 총 6천515명이 졸업했다. 올해 재학생도 전체 39명으로 학생 수 30명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또 학생 대부분이 다문화가정 자제와 다른 지역 유학생이다.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와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국내 사회상이 반영된 학생 현황이다.

100년 학교답게 국가와 지역사회를 이끈 많은 인재도 배출했다. 김기두(10회) 서울대법대학장, 정창용(11회) 예비역해병대훈련소장(대령), 김헌두(11회) 의사, 양해경(17회) 예비역 해군소장 해군제독, 김여선(20회) 체신부국장, 정동인(22회) 전남도교육감, 김진의(35회) 서울대공대 교수, 김종만(35회) 약사, 박창언(35회) 조선대 교수, 이만영(38회) 청와대 정무비서관 등이 광의초를 빛낸 얼굴(1회~38회)로 광의초등학교 100년사에 수록돼 있다.

노형도 제32대 광의초등학교 교장.

◇100주년 기념식 갖고 새 출발

광의초는 최근 ‘새로운 100년’을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광의초총동문회와 함께 지난 10월 8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당초 100주년 행사는 2년전인 2020년에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계획보다 2년 늦어졌다. 100주년 기념행사에선 경향 각지의 동문과 재학생, 지역주민들이 모여 기념식과 함께 기념비 제막, 역사관 개관, 100년사 발간을 축하했다.

광의초는 지난 9월 1일자로 노형도 제32대 교장이 부임해 100년 학교에 걸맞는 인재육성을 본격화하고 있다. 노 교장을 중심으로 12명의 교직원은 ‘자율과 협력으로 꿈을 키우는 행복한 어린이’를 교육목표로 삼아 미래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성장하는 학생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노형도 교장은 “광의초가 지리산 자락에 뿌리를 내리고 100여년동안 성장한 것은 교육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선배 동문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어서 가능했다”면서 “학생들이 선배들의 기상과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와 지역사회에 유용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구례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최낙식 기자 cns@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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