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인(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병인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은혜 갚은 두꺼비’라는 전래동화가 있다. 옛날 어느 동네에 살림 잘 하는 처녀가 한 명 살았다. 하루는 부뚜막에서 밥을 푸고 있는데 조그만 두꺼비 한 마리가 와서 앉았다. 밥을 푸는 김에 한 숟갈 떠주니 날름 집어먹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두꺼비는 강아지만큼 자랐다. 처녀가 사는 마을에서는 뒷산 성황당의 ‘지네신’에게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처녀가 제물로 뽑혔다. 처녀가 집에서 출발하려는데 두꺼비가 처녀의 치마자락을 물고 떨어지지 않았다. “나 없으면 밥 얻어먹기 힘드니까 따라 가려는구나”하고 처녀는 치마폭에 두꺼비를 감추어 성황당에 들어갔다. 제사를 지내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두꺼비와 처녀만 남게 되자, 큰 지네가 나타나서 처녀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두꺼비는 밤새도록 파란 불을 뿜어서 빨간 불을 뿜는 지네와 싸웠으며, 그 모습을 본 소녀는 기절했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가서 보니 두꺼비와 지네는 죽어 있었으며, 소녀는 살아 있었다. 소녀는 집으로 돌아왔고, 마을에서는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전통시대 공동체에 재난이나 우환이 닥쳤을 때 문제 해결 방법의 일면을 보여주는 전래동화이다. 풍어를 기원하며 용왕님께 처녀 공양을 하는 전래동화도 있는데, 비슷한 양상이다. 성황당의 지네신이든 바닷속 용왕이든 인간의 일상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온갖 종류의 고난과 어려움을 상징한다. 성황당을 헐어버려도 되고, 불을 질러도 될 것이었는데, 처녀를 바친 마을사람들은 그것이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했다. 바닷가 사람들도 매년 풍랑 속에 뒤집어지는 어선의 피해를 막기 위해 출항 날짜를 바꾸고, 기후에 대한 조짐을 더 헤아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한 동네에서 일상을 함께 누리던 누군가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나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신뢰를 찾을 수 없다. 인간생명을 존중하는 작금의 논리로 보면, 참으로 야만적인 조치였다. 이처럼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 사람의 목숨을 두꺼비가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구해줬으니, 진정 헌신적인 문제 해결능력을 보여준 셈이다. 두꺼비가 아니었다면 매년 그 누군가는 계속 죽어야 했을 터이니 말이다.

이유도 없이 누군가가 일정한 숫자만큼 죽어가는데, 국가나 공동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죽음을 묵인하거나 방치하는 일은 야만이다. 외국 어느 나라에서는 소위 ‘명예살인’으로 매년 천명 이상의 여성이 살해되고 있다. 나는 그 죽음을 ‘야만의 일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가 2천 명이 넘는다. 그것도 20년 째 같은 수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2021년에도 2천80명이 세상을 떠났다. 중대재해법이 작동 중인 올해에도 500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사라졌다. 매년 누군가 엇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지네신이나 용왕님께 처녀공양 하던 그 시절의 ‘원시적 야만’보다 더한 ‘문명의 야만’이다.

북한 해상에서 죽은 공무원의 죽음을 둘러싸고 전직 국방부장관과 해양경찰청장이 구속되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는지 웅변하고 있다. 한강변에서 세상을 떠난 의대생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자 몇 날 며칠 동안 수많은 경찰이 동원되어 수색에 나섰다. 이 시대 한 인간의 생명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어느 대기업 제빵공장에서 죽어간 노동자의 죽음은 그저 슬픈 사건일 뿐이다. 가맹점주의 피해가 걱정되어 불매운동도 전개하지 못한다고 한다. 얼마나 가상한 자본에 대한 배려인가?

똑같은 생명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목숨값’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부끄럽고 괴롭다. 매일 일곱 명의 노동자가 산업현장에서 죽어간다. 아침에 출근할 때 죽음을 자처하고 나선 노동자가 누가 있겠는가? 지네신과 용왕님께 바쳐진 그 처녀들처럼, 매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죽어간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은혜 갚아줄 두꺼비를 기다릴 뿐이다. 이 어찌 ‘야만의 방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헌법 1조 1항에서 이 나라의 주인으로 명시된 국민은, 10조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았으며,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받을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34조 1항에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부여받았고, 6항에서 국가로부터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약속을 제공받았다. 그리고 7조에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지명된 공무원이 ‘그 모든 것을 책임져주겠다’고 약속해주었다. 이와 같은 헌법 조항이 조금이라도 지켜지고 있다면, 흡사 정해진 숫자가 있기라도 하듯이 매일 누군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참담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실은 왜 이렇게 비참한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입만 열만 헌법정신 운운하는 정치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제발 헌법정신에 입각하여 ‘일상의 야만’을 멈추게 하는 이 시대 ‘은혜 갚은 두꺼비’가 되어보시라! 그리하여 온 천하 모든 생명의 목숨값이 다르지 않음을 증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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