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규(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임명규 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최근 여러 회의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영역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가끔 사업가, 학자, 공직자나 시민단체 대표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큰 회의가 열릴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회의 주제와 관련한 뾰족한 질문이나 날 선 비판이 사라진다는 것. 방금까지 회의장 바깥에서 은밀하게 주고받은 맹렬한 불만과 비판적 의견이 회의장 문턱을 넘으면 금세 자취를 감추는 기이한 상황의 반복. 방금까지 생생했던 사건의 맥락이 회의의 시작과 동시에 싹둑 잘린 느낌이랄까. 간혹 질문이 나오더라도 그 질문은 모두가 만족할 만한 행복한 결론을 전제하고 있는 둥글고 납작해진 말들 뿐이거나, 자기 지식을 장황하게 앞세우고 나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물음표일 때가 많다. 규모가 큰 회의일수록, 높은 분(?)이 참석하는 회의일수록 대체로 예측가능한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아무리 장점과 단점의 비율을 잘 배합해서 질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단점’은 능력의 한계와 책임의 소재로 향하기 마련이다. 비판은 ‘하나 된 우리’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불편한 주제나 피하고 싶어 하는 ‘차이’를 들추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답변과 재반론이 오고 가게 되면, 주최 측이나 사회자의 눈총을 받기 쉽다. 공정하게 배분된 시간을 혼자 독점하고 있다는 듯이…. 따라서 ‘호의’적인 무관심(무관심만으로는 부족하다)을 가지고 내용 없는 공감의 눈빛을 보이며 회의장의 자리를 채워주는 횟수가 많아지는 만큼 주변의 호감도도 높아지고 세평도 좋아진다.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2010)에서 3차 산업혁명 이후의 특징적 사회 현상으로 ‘연극적 자아’의 등장을 말한다. 연극적 자아는 남의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중요한 촘촘한 네트워크의 시대에 다중적인 정체성을 넘나들며 여러 개의 자아를 연기하는 개인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최근 미디어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부캐’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연극적 자아(개인)에 대한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리프킨은 연극적 자아에 관한 한 예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상황을 제시한다. 그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관한 스토리를 가지고 투자자와 고객의 상상력에 불꽃을 붙여야 하는 창업가들은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드라마의 특권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이를 본 “청중은 불신을 잠시 유예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연극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청중은 실제로 창업자가 만들어 낸 허구의 배경에 자신을 놓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예정된 모험을 강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일종의 역할극이 벌어지는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배역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설정한 캐릭터가 기대하는 반응(reaction)까지도 섬세하게 완수해내는 것이 개인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리프킨이 말하는 창업가와 청중의 모습이 사회적 현안이나 정치적 사안을 다루는 회의장 안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아주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좁은 지역사회, 혹은 촘촘한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무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내용 없는 동어반복이 여전히 사회생활의 금쪽같은 삶의 지혜로 유통되는 이유이다. 질문이나 비판 이후에 쏟아질 냉냉함 보다는 나에 대한 호감을 관리하는 쪽이 더 경제적이지 않은가. 부득이 비판하려면 넘치는 애정이 담겨있다고 치장하는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믿는 분위기에서, 질문이나 비판하는 사람이 입을 떼기까지 감내해야 할 부담감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각 개인의 평판과 처세가 공적 갈등의 민주적 해결보다 우선인 사회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질문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일 것이다. 바로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존재. 뾰족한 질문이 실질적으로 차단된 공론장에서 민주적인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타당한 질문과 합리적 비판을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닫힌사회에서 강조하는 자유란 얼마나 허약한 자유인가. 작은 송곳 하나로도 찢기는 무대 위의 투명한 장막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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