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5일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것은 한 마디로 ‘파격’에 가까운 행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종래 그의 공개활동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데다 평양주재 외국공관 방문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중국대사관 방문을 보도한 북한 중앙방송도 방문 배경에 대해 이렇다할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그의 방문 배경을 놓고 뭐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보도에서는 그것을 추론할만한 실낱같은 단서를 남기고 있는데 ‘2000년 새해에 즈음하여’, ‘중국대사의 요청에 따라’라는 언급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총비서의 중국 방문이 ‘2000년 새해에 즈음하여’ 그리고 ‘중국대사의 요청에 따라’이루어졌다는 것이다.
‘2000년 새해에 즈음하여’라는 표현은 흔한 외교적 언사로 볼 수 있지만 북한입장에서 새 시대를 맞아 새로운 관계정립의 필요성에 대한 시사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후 소원했던 양국관계를 지난해 6월 초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일단 예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이는 양국관계가 과거의 전통적 우방 수준으로 복원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새 천년을 맞은 양국관계의 미래지향적 발걸음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즉 관계회복의 기틀 위에서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관계설정이 요구된다는 관측이다. 지난해 말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김 총비서의 중국방문설과 장쩌민 중국 주석의 북한방문설도 이런 전제 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위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김 총비서의 중국대사관 방문은 자신의 중국방문을 앞두고 분위기 조성을 위한 유화제스처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김 총비서가 중국을 방문할 경우 적지 않은 대북지원 ‘선물’을 준비해야하는 중국의 입지를 고려해 유화제스처로 선수를 쳤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김 총비서의 중국방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에 지척에 있는 대사관을 방문함으로써 최소한의 ‘성의’를 표시했다는 다소 상반된 의견도 그럴듯하게 제기되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비교적 만족할만한 지원을 받아낸 북한의 입장에서 김총비서가 직접 베이징까지 찾아가지 못하게 됨에 따라 대사관 방문이라는 ‘어려운 발걸음’으로 성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김 총비서의 중국대사관 방문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을 앞두고 중국 지렛대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산된 몸짓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한 탈북입국자는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 협상을 시작한 시점에서 ‘인권문제’ 등으로 미·중관계에 틈이 생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해 대중국친밀도를 과시함으로써 협상에서 중국지렛대를 최대한 활용해 보자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대사의 요청에 따라’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두 가지 다른 견해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말 그대로 완융상(萬永祥) 대사가 김 총비서의 방문을 요청했다는 분석과, 북한쪽에서 모양새를 의식해 ‘중국대사의 요청’이라는 형식을 요구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전자는 완 대사가 곧 평양주재 대사직을 떠나 브라질대사로 전보된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는 견해라면, 후자는 자존심을 중시하는 북한 외교의 관례에 무게를 두는 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그것이 김 총비서의 이번 대사관 나들이를 만족할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데 한계가 있다.
이밖에 오는 10월의 북한 노동당 창당 55주년을 앞두고 이 행사에 중국 고위급 축하사절단의 방북을 유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시각이 있는가하면 3월중 백남순 외무상의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순방과 맞물린 외교적 처신이라는 해석도 그럴듯하게 들리고 있다.
주룽지 국무원 총리가 5일 중국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제 3차회의 개막에 즈음한 정부공작(업무)보고를 통해 북한과는 전통적 우의를, 남한과는 호혜와 협력을 언급하고 같은날 일요임에도 불구하고 김 총비서가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것도 ‘우연’치고는 미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 김 총비서의 이날 행보와 관련, 통일부 당국자는 “북·중관계 공고화라는 포석과 김 총비서의 중국방문이 어려워진데 따른 반대급부라는 상이한 분석이 병존하고 있는게 사실”이라면서 좀더 면밀한 분석과 검토가 필요하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연?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