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1>
3면이 태자하와 산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
2013-01-09 남도일보
유리왕, 양맥족 정복 후 쌓은 고구려 사람들의 보금자리
현지인들 “기름진 땅에다 큰 자연재해 없는 축복의 고장”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연나라 태자 丹 슬픈 전설 전해져
<고구려 내륙 근거지 태자성①>
이 태자하의 발원지와 가까운 신빈현 하협하향(下夾河鄕)의 태자하 남안에 삼면으로 강물이 감돌아 흐르고 또 삼면으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2천년이 넘는 옛 성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중국에서 태자성(太子城)이라 일컫는 고구려의 옛 성이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은 고구려가 혼강(渾江) 유역에 나라를 세운 뒤 제일 먼저(유리왕 때) 삼켜버린 양맥(梁貊· 옛날 양수<梁水>, 즉 태자하 상류지역의 오랑캐<貊>라는 뜻) 부족(部族)의 왕성(王城) 중 하나이다. 고구려가 이곳에다 성을 새로 쌓고 양성(梁城)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즉 ‘호태왕(好太王)’ 비석에 조각되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이 성을 또 맥성(貊城)이나 양맥성(梁貊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은 고구려역사와 관련되는 사서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산성으로서 고구려시기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요동복지(腹地) 고구려 사람들의 근거지와 보금자리이다.
흰 눈이 천지를 뒤덮은 12월의 한 차가운 날에 필자는 태자성을 답사하였다. 이날, 심양(沈陽)에서 매하구(梅河口)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신빈현 남잡목(南雜木)에 이르러 거기서 관전(寬甸)으로 가는 성도(省道)를 따라 남쪽으로 약 65㎞ 달리니 목적지 태자성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태자성 남측 가파른 산등성이 아래에 오붓하게 자리잡고 있는 태자성 마을에 들렀다. 지금 1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태자성과 함께 북·동·서 3면으로 큰 산에 둘러싸여 바람을 등지고 양지바른 국지적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기원전 226년, 한 갈래 방대한 대열이 연나라(燕國) 도읍 계성에서 황급하게 출발해 요동으로 달려온다. 이것은 도망가는 대열로서 이를 이끄는 자는 연나라 43대 국왕이자 바야흐로 연나라 마지막 황제가 될 희(喜)와 그의 아들 태자 단(丹)이다. 이에 앞서 진(秦)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荊苛)를 보내어 진시황을 자사(刺死)하게 했다. 하지만 하늘은 연나라를 돕지 않았다. 도궁비수견(圖窮匕首見·그림을 다 펴자 비수가 나타났다는 뜻)하는 역사사건이 생겨 형가는 살해당하고 만다. 크게 노한 진시황은 대장 왕전을 파견,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진나라군은 승승장구로 연나라 도읍까지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태자 단은 부랴부랴 2만명의 정예군을 데리고 국왕 희를 호위하며 요동으로 도망 오게 된 것이다.
태자 단 등이 도망간 소식을 알게 된 진시황은 분해서 대장 이신(李信)을 파견해 신속히 요동으로 추격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하나는 앞에서 도망가고 다른 하나는 그 뒤를 쫓아가는 두 대열의 인마(人馬)들이 요동 땅에서 새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달린다….
한편, 이신이 이끄는 진나라군은 쉴 사이 없이 달려 양평성까지 추격해 왔다. 그러나 태자 단 부자(父子)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고 남아있는 것은 빈 성 뿐이었다. 이신의 대군은 산봉우리들이 기복을 이루며 끝없이 이어진 요동의 산맥을 바라보며 막연해 탄식만 할 뿐 어쩔 수가 없었다….
한편, 연나라왕 부자를 놓쳤다는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노발대발해 양평에 머물러 있는 이신에게 계속 그들을 추적하도록 명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연나라 왕 희는 또 당황해 했다. 이때, 대군(代郡)에 도망가 임금을 자처하고 있던 조나라 공자(公子) 가(嘉)는 연나라 왕 희에게 편지를 보내 “진시황이 연나라를 소멸하려 한 것은 태자 단을 미워해서 그러는 겁니다. 만약 폐하께서 태자 단의 수급을 보낸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입니다”라고 권고했다. 연나라 왕 희는 고민 끝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진 마음을 먹었다. 그는 태자 단을 불러다 술을 먹여 만취하게 한 다음 손을 썼다. 그리고 나서 아들의 수급을 이신의 군에 보냈다. 아들을 죽이고 대성통곡하는 연나라 왕 희는 너무도 슬퍼서 살 의욕을 잃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산성의 군사들과 주변에 백성들은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마침 초여름인 5월인데 하늘에서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져 평지에 2척 5치의 두께로 쌓이고 기온이 떨어져 겨울처럼 추웠다고 전한다. 아마 하늘과 땅도 감응이 있는가 보다. 아들의 죽음으로 연나라 왕 희는 한동안 평온한 세월을 보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222년, 진나라군이 쳐들어와 연나라 왕 희는 포로가 되고 연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녕조선문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