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옥 변호사의 호남정맥 종주기
(17) ‘밀재-오정자재’ 구간
2019-05-23 김명식 기자
(17) ‘밀재-오정자재’ 구간(2019. 3. 16.∼17.)
모처럼 활짝 갠 날씨…파란 하늘 배경 남근바위 우뚝
바위보단 숫제 봉우리 가까워…수리봉 가는길 암릉 계속
밀재 출발 추월산 등반길 완만…보리암쪽은 급경사 길
호남정맥 암릉 위 소남무 일제 항거 김병로 선생 절개 연상
9시 50분에 산행을 시작하는데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9시 57분경 트랭글을 켰다. 밀재에서 추월산에 오르는 길은 상당히 완만하다. 보통 광주사람들은 보리암 쪽으로 추월산을 오르는데 그 길은 꽤나 가파르다.
날씨는 지난주보다 추워져서 이제 막 피어나는 생강꽃이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다. 불과 3∼4미터 차이인데 정맥길 우측의 양지바른 쪽에 있는 생강나무는 벌써 꽃을 활짝 피웠다.
정맥길 왼쪽의 순창군 복흥면 쪽 사면은 참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조림을 해놓아서 헐벗은 산처럼 보인다. 조림한 나무들은 너무나 가늘어 무슨 나무인지도 알 수 없는데, 친구 얘기로는 표고버섯 재배를 하는 이들이 참나무를 베어내고 참나무 묘목을 다시 심은 거란다.
12시 10분경 다다른 710봉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가인연수관으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위험하여 로프에 의지해야 한다. 10여년 전에 눈 쌓인 이 구간을 하산하면서 로프가 얼어 있어서 애를 먹은 추억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가인 김병로 선생은 1906년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을 습격한 폭도(?) 출신이다. 일본 침략자들이 한일합병을 하기 전 전라도에서 대한제국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의병이 일어났는데, 일제는 이를 폭도라 부르고 ‘남한대토벌 작전’을 벌여서 화승총이 주무기인 의병들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한 바 있다.
의병 투쟁이 실패로 끝나고 가인은 1910년 도일하여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다음 1919년부터 경성지방변호사회 소속으로 변호사 개업을 한다. 그 뒤로 10여년을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 등 수많은 치안유지법 사건을 무료 변론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1932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은둔하였다 한다. 은둔생활 중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일제가 주는 배급도 거절하였다고 하니, 그 기개는 가히 호남정맥 추월산의 암릉과 그 위의 낙낙장송을 닮았다고나 할까.
가인연수관 바로 뒤에는 드넓은 밭이 펼쳐져 있는데 혼자 사는 기인이 수천평이 넘는 밭을 경작한다고 한다. 마침 그분이 통나무로 만든 농막 앞에 나무탁자가 놓여 있어서 편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 위에는 묵제정(默帝亭)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도 보이는데, 이 집 주인이 말없는 황제이신가 보다.
다음날인 3. 17. 오후 1시에 다시 천치재에 도착하여 오정자재까지 단독산행을 하였다. 치재산, 용추봉, 깃대봉으로 이어지는 10.9km 구간을 3시간 46분 만에 주파하였다.
용추봉 올라가는 길에 키가 넘는 조릿대 숲과 508봉과 310봉의 매우 위험한 암릉구간이 기억에 남는 구간이었다. 오후 5시에 오정자재에 닿아 다시 순창 복흥콜택시“(063)652-7747)”로 기사를 부르니 10분 만에 도착한다. 참고로 개운치부터 추령, 감상굴재, 밀재, 오정자재는 모두 순창 복흥콜택시를 불러야 요금이 싸다.
다음 주는 순창 강천산 구간과 담양 산성산 구간을 종주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