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 이야기=[51]뉴노멀 '섬 정체성' 실천
“‘외로움·평화’주제로 한 제주 이야기” 담아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개관 …섬 정체성 실천 “제주 토박이도 모르는 내밀한 속살 묘사” 평가 ‘제주 열풍’ 속 수 많은 육지 사람들 실천 주역
팬데믹 상황에서 맞는 세모는 조용하다. 대통령 선거가 말 그대로 코앞에 다가온 설날 연휴를 지나는 중인데도 그렇다. 2020년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 WHO가 팬데믹을 전격적으로 선언한 이래 익숙해진 우리의 일상 풍경이다.
지난해 1월 31일 이 지면에 ‘사라지는 섬, 쇠퇴하는 인류’라는 제목의 글을 실은 이래 일 년 동안 네 번의 글에서 팬데믹과 새로운 일상(New Normal)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백신과 백신 패스를 통한 면역과 방역의 총체적인 대응에도 일상 회복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섬, 변화의 물결’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모두 다섯 편의 글을 기고할 계획이었다. 첫 번째 글을 경자년 섣달에 시작해서 임인년 설날과 입춘을 넘겼으니 음력으로는 3년째다. 그동안 네 편의 글을 기고했는데, ‘뉴노멀 섬 정체성의 실천’이라는 부제를 담은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마지막 글이 남았다.
올해는 ‘섬다움의 변화와 혼돈’이라는 주제에 맞춘 글을 쓰기로 했는데, 문득 지난해 마지막 기고문이 생각났다. 그리고 매듭을 지어야 새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지난해 글은 기후 위기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고령화, 그리고 연륙 등으로 섬이 사라지고 있지만, 사라져야 할 것은 도서성을 낙후성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인식이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
영화 ‘자산어보’의 개봉에 때맞춘 두 번째 글에서는 작가 황석영의 저서 제목인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빌려서 섬에도 섬사람이 살고 있으며, 섬사람의 입장에 서야 섬 정체성을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름 휴가철 직전의 글에서는 서남해안의 보석처럼 빛나는 섬들의 서로 다른 얼굴은 그곳에 사는 섬사람이 만든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얼굴은 지금도 변하고 있는 섬의 정체성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일상 회복의 기대가 커졌다. 그동안 고립과 소외로 요약되는 섬의 정체성으로 돌아갈 일은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기 때문에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정현종 시인이 쓴 ‘섬’이라는 시구처럼 ‘가고 싶은 섬’이라는 새로운 일상에서 돌아가면 좋겠다는 기대를 담았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섬사람의 입장에서 알 수 있는, 그래서 섬사람이 만들어가는 섬들의 서로 다른 얼굴들을 꼭 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섬 정체성과 섬사람 이야기를 네 번에 걸쳐 풀어놓았다.
글을 기획할 때에 앞선 네 편의 이야기를 ‘실천’이라는 주제로 매듭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를 담았던 사진작가 김영갑의 저서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패러디한 제목을 미리 뽑아 두었다. 김영갑 작가는 ‘제주 열풍’이 불 낌새도 없던 1982년부터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진 작업을 하다가 제주에 매혹되어 1985년 아예 정착했다. 제주 곳곳을 다니며 노인과 해녀,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억새 등 그가 사진으로 담아낸 것은 제주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는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사진에 담았고,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수행이라고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친 것’이라고 평가했다.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던 중에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2002년 여름에 열고 2005년 5월 소천할 때까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를 즐기며 갤러리를 지키고” 있었던 김영갑 작가는 섬 정체성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제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누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가 사진에 담아낸 것은 ‘외로움과 평화’를 주제로 한 제주 이야기였다. 그가 찾기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으되, 이야기로 담아내기까지는 세상의 이목을 끌지 못하던 이야기 말이다.
“그 안에서 터 잡고 살아온 토박이들의 눈물겨운 삶을 그만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심지어 제주 토박이들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섬의 내밀한 속살을 그는 무심히 스쳐 가지 않는다.” 출판사의 서평은 당연히 이 위대한 작가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고, 그 시선이 가서 닿은 곳의 의미를 멋지게 담아낸다. 이 서평에 뭉클해진 가슴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득 제주에서 20년을 산 제주 토박이, 곧 도민(島民)으로서 지금의 제주 정체성에 한 몫을 당당히 해냈다는 평가가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문을 연 지 만 스무 해를 맞은 올해, 이 글을 쓰면서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을 찾았다. 친필 서명이 담긴 인쇄본 사진을 건네주며 작가와의 오랜 인연을 이야기해주던 선배 교수가 소천한 지 올해로 10주기가 되었다.
그 사이 제주 열풍이 불어 수 많은 김영갑이 ‘제주 사는 도민’이 되었다. 누군가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여 가슴에 새길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삶을 살아 보여줄 것이다. 이 모두가 제주의 정체성을 실천하는 주역들인 것이다.
글·사진/김치완(제주대학교 교수)
정리/김우관 기자 kwg@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