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남평문씨(南平文氏) 풍암공파 농포공 종가 / 해룡성고택 [100]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사물이치 통달한 문다성의 후예 명필·명재상·성리학자 배출 전라의병 ‘호남 사수’전략 마련 후손, 선비정신 지키며 유적 보존
진법 용병술로 왜군 격퇴…선비 의병장 가문
순천만국가정원이 있는 전남 순천 도사동에는 해룡창(사비포, 조양포) 조창이 있었던 해룡산이 있다.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왕건의 고려 개국에 참여해 그의 세 딸이 태조 18비, 정종 문성왕후·문공왕후가 되면서 위상이 높았던 승주목의 요충지로서 방어를 위해 축성한 해룡산성(홍내산성)의 유허가 남아있다. 임진·정유 전란에는 의병군을 이끌고 용병술과 병법으로 호남을 공략하려는 왜군의 서진을 격퇴하고 북상을 방어했으며, 종전 후엔 선비다운 삶으로 돌아가 학덕을 쌓았던 의병장 문위세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곳이다. 이곳 홍두마을의 순천 남평문씨(南平文氏) 풍암공파 농포공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고려 태사태부 문다성 시조
남평문씨는 고려 태사태부 문다성을 시조로 모신다. 시조설화에 따르면 호남 남평군의 큰 연못가에 있는 높은 바위 아래를 노닐던 군주(郡主)가 바위 위로 오색구름이 감도는 걸 보고 이상히 여겼고 그 위엔 석함이 있어 끌어내려 열어보니 백설 피부의 아기가 있으므로 데려다 양육했으며, 아이는 5세에 글과 사물이치를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과 재주가 뛰어나 성을 문(文)이라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하며 호를 해달별을 의미하는 삼광(三光)이라 했다고 한다. 그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남평개국백에 오르고 벼슬은 태사태부를 지냈다.
문다성의 후손 문익은 고려 숙종 때 고주사 겸 밀진사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서북면병마사를 거쳐 우산기상시에 올랐다. 그의 아들인 2세 문공유(1088~1159)는 당송에 알려진 명필로서 문과급제해 이자겸 집권으로 유배됐다가 합문지후에 복직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묘청의 난 이후 호부낭중 동궁시독사 지제고, 지어대사, 서북면병마사 시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 시형부상서, 예부 형부 병부상서를 역임했다. 그는 명필글씨 묘향산보현사창사비문과 음기를 남겼고 시호는 경정이다.
◇어진 재상 문극겸 무명 보급 문익점
3세 문극겸은 충효 근검하고 어진 재상이란 명성을 얻었으며 과거급제해 좌정언으로 직언하다 좌천돼 무신정변의 화를 피하고 우승선 어사중승으로 문신들을 구했으며 무신집권의 난세에 살아남으며 벼슬은 중서시랑평장사, 권판상서이부사에 올랐다. 시호는 충숙이며 남평 장연서원에서 추모한다. 7세 문극검은 문과급제해 좌정언, 좌의사, 판도판서, 대사의사부를 역임하고 판전농시사 개성윤에 올랐다. 8세 문득준은 문과급제해 한림학사를 지내고 판도판서로서 탐라에서 해적을 소탕한 공을 세워 예부상서에 올랐고 시호는 의안이다.
12세 문익점(1329~1398, 호는 삼우당)은 독실한 효행의 성리학자로서 가정 이곡 문하에서 수학해 이색과 정동향시에 입격하고 정몽주와 함께 문과 급제하고 김해부사록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관대사성,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 좌사의대부 시락, 서연동지사를 지냈다. 좌정언으로 원나라에 갔을 때 목화씨를 들여와 진주에서 정천익과 함께 목면나무를 재배했으며(시배지, 사적 제108호) 무명 베 짜는 기술이 나라 백성에게 보급토록 기여했다. 이성계의 전제개혁에 반대해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사후에 강성군, 충선공 부민후에 봉해지고 도천서원과 부조묘에서 추모한다. 그의 아들인 13세 문중성(1350~?, 호는 순질)은 진사시에 입격하고 한림원 학사가 됐으나 간의대부 병부상서를 사임하고 불사이군을 고집하며 은거했다. 그가 순질공파를 열었다. 16세 문상행은 문과급제해 용담현령, 예조참의로 치적이 있으며 김숙자와 종유하며 유학의 종장이 됐다. 18세 문양은 진사시에 입격했고 은거해 인재양성에 매진한 학덕으로 추천돼 선전관으로 제수됐고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
◇의병봉기한 6부자 공신
그의 아들인 19세 문위세(1534~1600, 호는 풍암)은 어초은 윤효정의 외손자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외삼촌 윤구에게 공부하고 류희춘에게 경학을 배웠다. 퇴계 이황 문하에서 35세까지 공부해 학덕이 세상에 알려졌으며 진사시에 입격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도학을 실천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매형인 박광전과 호남 사수를 결의하고 의군과 군량을 모아 임계영을 대장으로 하는 전라좌의병군을 구성했으며 양향관(군수작전관)을 맡아 금산·무주·개령·성주 등에서 적을 격퇴했다. 용담(남원)현령으로 재직할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성을 규합해 방어진을 구축해 왜군의 북상을 저지했다. 퇴계는 제갈량의 팔진도를 그에게 전해주며 연구를 권했고 이를 바탕으로 의병군 연승과 용담현 방어하는 활약을 했다고 한다. 종전하자 낙향해 초야의 선비로 돌아왔고 ‘풍암실기’를 남겼다. 강성서원 월천사, 나주 충장사에서 추모한다. 그의 아들 문원개, 문형개, 문영개, 문홍개, 그리고 조카 문희개가 함께 거병해 공신록에 올랐다. 24세 문덕희는 장흥에서 순천으로 입향했다. 27세 문사중(1798~1883, 호는 농포)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을 지내고 해룡산성에 터잡아 간척지를 운영하며 학행과 효행의 가통을 이었다. 후손들은 고문서를 보존하고 ‘청태전차’를 전승하며 선조가 남긴 선비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