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중공파 정언공후 조병수 종가 [102]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용신의 후예 조계룡 시조로 모셔 고려 명문가 충절 지킨 효자 후손 어머니 뜻 따라 출사·사후엔 출가 충신 집안 효행 전통 고을도 빛내
고려 충신·조선 효자…빛나는 충효 가문
우리나라 세번째로 큰 섬 진도에는 호랑이 지형에 자리한 호구마을이 있다. 고려에 절의지킨 충의지사가 입향해 왜적을 격퇴하고 충의 고장으로서 진도의 위상을 높였으며 구빈구휼과 수리관개시설 마련, 교육과 교통망 확충 등 주민 삶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을 배출한 가문이 대대로 세거하고 있는 마을이다. 호구마을에서 선조의 충효 행적 계승에 힘쓰고 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중공파 정언공후 조병수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대대로 평장사 배출한 고려 명문
창녕조씨는 신라 태사 조계룡을 시조로 고려-조선-현대까지 가통을 잇고 있다. 창녕조씨의 득성설화에 따르면 창녕 화왕산 용지에서 목욕한 이예향이 태기를 얻었고 꿈에 아이는 동해신룡의 아들이며 겨드랑이에 조(曺)자가 있을 것이라 해 훗날 태어난 아기를 봤더니 그대로였다. 진평왕은 직접 불러 선명한 조(曺)자를 확인하고 조시 성을 내리고, 계룡(繼龍)이라 이름 했다. 이 시조설화는 여지도설 등에 기록됐고, 창녕조씨득성지비와 용지는 경상남도 기념물이 됐다.(제246호)
6세 조겸은 고려 태조의 덕공공주와 혼인해 태악서승을 지내고 창녕조씨 중시조가 됐다. 후손들이 8대 연속 문화시랑평장사에 올라 고려 명문이 됐다. 조겸의 손자인 8세 조연우로부터 조한지, 조지현, 조사전, 조정린, 조중룡을 거쳐 14세 조의문까지 대를 이어 평장사를 지냈다. 15세 조자기는 현종조에 분대어사, 전중시어사로서 거란의 서경 침략, 여진의 영일 침입을 격퇴해 시어사헌에 올랐다.
◇불사이군 충절 선비 조희직 입향조
25세 조정통은 충렬왕-충선왕 때 시중을 역임했다.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과거급제한 ‘조씨5룡’으로 조경룡은 참판, 조응룡은 판서, 조한룡은 시중, 조섭룡은 참의, 조겸룡은 감사를 역임했다. 26세 조한룡(?~1414, 호는 세염, 시호는 청간)은 문과급제해 상서를 역임했다. 고려가 망하자 옷자락에 ‘충신불사이군’이라 쓰고 금천에 은거하다 불교에 입문했다. 어머니의 반대로 다시 참의를 역임하며 명나라에 가서 명황제로부터 보의장군 작위를 받았다. 태종은 효자동에 ‘여충선효(麗忠鮮孝)’라는 보의장군효자비를 세우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승려가 돼 불회사를 중창하고 화순 만연사 법당을 중건하며 원정국사 법호를 받았다. 나주시 오룡동 효자리의 충효사, 진도 효충사에 배향됐다.
28세 조희직은 공민왕 때 우정언을 역임했고 승려 신돈의 실정과 횡포를 탄핵하다 가흥현(진도) 호장으로 좌천됐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사촌동서로서 중앙 벼슬에 출사 요청이 있었으나 ‘고려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 국은에 보답하지 못했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 절의를 지켰다. 진도 군내면 정자리에 압구정을 짓고 학문과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 벽파정에 진도 정경을 읊은 그의 시가 걸려 있다. 그가 가문의 진도 입향조가 된다. 그의 아들 조근, 손자 조민수가 호장을 지냈다.
◇진도를 빛낸 조씨 가문
35세 조복명은 세종 때 무과 급제해 참군을 역임할 때 진도가 군으로 분리 승격하는데 공헌함으로써 향민에게 자부심을 안겼다. 그는 왜구가 침입하자 주민을 모아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고, 진도군 승격 행정치소 설치의 공로를 인정해 진도 향현사 8현 중 주벽으로 배향됐다. 효충사, 모현사에서 추모한다. 37세 조맹문도 진도 설군과 진도향교 창건에 공헌해 진도 향현사 8현 중 한 선생으로 추배됐다.(진도군 향토문화유산 제12호 향현사)
48세 조영현(1853~1916)은 독실한 효행과 돈독한 우애를 실천해 남성문인(南省聞人)으로 이름났다. 그의 어머니 밀양박씨는 지극한 선행과 열행이 알려져 정각과 열행비를 세워 추모한다. 박씨의 남편 조경눌은 20대에 갓난 아이 조영현을 두고 중병을 얻게 돼 부인 박씨에게 유언해 ‘가문을 이을 아이가 있어 다행이나 보호해 줄 사람은 오직 당신이 있을 뿐’이라며 눈물로 양육을 부탁했다. 빈궁해도 장례하고 엄한 교육으로 아이를 돌봤고, 토지 임차로 경작하고 길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제사와 선행으로 일관한 칠십 평생을 마감했다. 박씨의 가르침에 따른 조영현은 근면한 농업경영으로 부를 쌓고 이웃에 구휼하며 음덕을 베풀었다.
그의 손자인 50세 조병수(1893~1971, 호는 묵암)는 개화기 진도 발전에 족적을 남긴 향촌의 선각자다. 진도 최초의 언론인(조선일보 진도지국장)이며, 도서인 진도에 택시, 버스, 여객선 등을 운행하며 지역민 교통여건을 개선했고, 저수지를 축조해 가뭄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는 대지주이면서도 소작인회를 설립해 소작료를 낮췄으며, 진돗개 보전에 힘쓰고 유치원을 설립하며 교육 발전에 앞장섰다. 종가와 문중은 효충사 등 유적을 보존하며 선조의 충효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