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서구 충주박씨(忠州朴氏) 문간공 종중/종가 [104]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라 왕손 고려 부정 박영의 후손 고려 충신 은거한 백마산 절골마을 폐정 개혁 상소 등 의로운 충신 가문 기념관 마련 등 유적 보존에 힘써

2022-04-28     서정현 기자

문장가·청백리·공신 배출한 절의 명가

봉산재

광주 서구 백마산 자락에는 서창들판과 영산강을 앞에 둔 절골마을이 있다. 청백리 박상 선생이 낳고 자라 현재에 이르는 전통마을 박씨 집성촌이다. 기묘명현, 명재상, 왜란 의병 충신들을 배출한 가문의 전통이 현대 시문학의 대표시인 용아 박용철에 이어졌다. 절골마을에서 인근 소촌동, 송정리 등에 5백여년을 세거하며 선조가 물려준 문학애호와 절의정신을 지키며 번성한 충주박씨 문간공 종중과 종가의 내력을 알아본다.

◇고려 충절 지킨 찬성공 박지흥 입향조
충주박씨는 고려 부정 박영을 1세조 관조로 모신다. 그는 신라 경명왕의 여덢 아들 중 다섯째 박언창의 후손으로 충주(중원)에 살았고 그의아들 박신이 고려 검교신호위대장군을 지내며 관향 충주를 떠나 개경으로 이거했다. 8세 박광리는 개성쇼윤을 지냈으며 고려말 권신 임견미의 횡포를 탄핵했다. 9세 박소는 은산군사를 지냈고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사헌부감찰을 지낸 형 박진과 함께 충청도 덕진(현 대전광역시)으로 낙남했다. 박소의 넷째 아들 박지흥(찬성공)은 진사시에 장원 입격하고도 전라도 광주 봉황산 아래 은거해 호남입향조가 됐다. 그와 동문수학한 권람이 수차례 세조에게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고 병조판서에 증직됐다. 그의 후손들이 광주 송정리 인근 절골과 소촌 등에서 청렴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번성했다. 박지흥의 큰 아들인 11세 박정은 학행과 문장이 알려져 지방을 순찰하던 김종직이 찾아보고 기특히 여겼으며 그의 학덕은 박상, 박우 두 동생에게 영향을 줬다.

◇삭탈 각오 상소한 박상 청백리
박정의 동생 박상(1474~1530, 호는 눌재)은 탁월한 문장가로 문과 급제하고 교서관정자, 사간원헌납, 전라도사, 임피현령, 홍문관수찬, 경연시독관, 담양부사를 역임했다. 이 때 중종비 신씨 폐위사건이 일어나자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류옥과 함께 삼인대에 모여 살탈관직을 각오하고 각자의 관인을 나무에 걸며 복위 상소를 작성한 일화가 알려져 영조조에 와서 신씨를 단경왕후로 올리고 이들의 선비정신과 충정을 기리는 삼인대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를 세웠다. 기묘사화 이후에는 상주, 충주, 나주 목사를 역임하며 백성에게 고통 주는 폐단을 바로잡아 두번이나 청백리에 올랐다. 동국사략을 수찬하고 청송당서를 짓고, 도청절문집, 매월당문집 등을 간행했으며 1천200여편의 시부를 눌재집에 남겨 문학사에도 족적이 뚜렷하다. 그는 윤구, 임억령, 유성춘, 최산두, 신잠 등과 교유했으며 기묘명현에 올랐고, 문간공 시호와 송호영당이 하사됐다. 덕산서원, 봉산서원에 배향됐다.

◇임란 공신 박희수 충절 계승
한성좌윤 박우(1476~1547)의 아들인 12세 박순(1523~1589, 호는 사암, 시호는 문충)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해 문과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 홍문관수찬·응교를 지냈고 윤원형에게 미움을 사 파면됐다가 한산군수, 성균관사성, 승정원좌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역임했다. 동서 붕당 대립이 본격화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탄핵 받아 물러났다가 이이, 성혼의 추천으로 영의정에 올라 폐정 개혁을 주창했다. 그율곡학파와 구분되는 화담학파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계승한 그의 학문업적과 당시풍의 문장이 사암집에 전한다.

박상의 손자인 13세 박희수(1540~1599, 호는 회헌)는 회재 박광옥, 제봉 고경명에게 수학하고 후릉참봉이라는 음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박광옥, 고경명과 함께 의병창의해 종형 박대수, 종질 박지효와 더불어 의군을 모으고 군량을 확충하고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의 공이 인정돼 한성부참군, 사포서사포, 형조좌랑에 제수돼고 원종공신에 올랐다. 박용철(1904~1938, 호는 용아)은 가문의 학덕을 이어 휘문의숙, 배재학당,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 문예잡지를 간행하고 정지용시집, 영랑시집 등을 발간했으며 ‘떠나가는 배’ 등 명작 시를 박용철전집에 남겼다. 후손들은 종중을 중심으로 ‘가전충효 세수돈목(家傳忠孝 世守敦穆)’ 가훈을 지키며 유물관 건립 준비 등 절의·청백 명신 선조들의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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