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고려인마을 우크라이나 난민보고서](7)법적지위와 체류자격...현실과 동떨어진 ‘할아버지 나라’의 법…정착 어려움
출입국 자유 ‘재외동포’ 인정안돼 체류 기한 있는 ‘외국인’ 분류 재외동포법 아닌 출입국법 적용 법적지위·체류자격 차별받아 방문취업비자로 일용직 등 종사 취업·교육·의료 등 문제점 노출 무국적자도 상당수…앞날 불투명 ‘재외동포기본법’ 제정 목소리
우크라이나 전쟁 포화를 탈출한 고려인들은 광주에 도착하면 먼저‘고려인 쉼터’로 향한다. 쉼터는 (사)고려인마을이 광주 광산구 삼도동의 한 농촌마을에 마련한 숙박시설이다. 고려인 난민이 입국 후 체류비자와 외국인 등록증 발급을 준비하고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2∼3주간 머무는 임시 거처다.
쉼터에 머물면서 고려인들은 한국생활 적응 과정을 하나 둘씩 밟아간다. 성인들의 경우 대개가 가장 먼저 법무부 광주출입국·외국인 사무소에서 실시하는 ‘조기 적응 교육’을 받는다. 한국 생활에 필요한 기본정보와 쓰레기 분리수거 방법 등 기초생활정보, 동포들이 취약한 범죄 정보 등을 배운다.
교육을 받고 외국인 등록증이 나오면 한국 거주 외국인으로서 공식 인정받는다. 취업을 할 수 있고 은행 통장과 휴대폰을 개설할 수 있다. 건강보험가입 자격도 획득한다.
◇국가·나이로 법적지위 차별
우크라전쟁이후 광주에 안착한 고려인 대부분은 노인·여성·어린이들이다. 남도일보가 고려인마을 항공권 지원을 받은 고려인 607명(8월 31일 기준)의 연령과 성별 등을 분석한 결과 여성 390명, 남성 217명이다. 여성이 2배 가까이 많다. 특히 19세 이하 영·유아 및 10대 청소년이 214명(남 108·여 106)으로 전체 35%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여성의 경우 30~40대가 118명으로 가장 많았다. 무국적자도 30명 정도다.
광주에 온 고려인은 어떤 법적 지위를 보장받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을까.
고려인의 법적지위는 재외동포법에 의해 정해진다. ‘고려인 특별법’이 있지만 국내 거주 고려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유명무실하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법은 재외동포 범위와 체류자격, 권리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고려인이 재외동포로 인정되면 국내체류에 제한이 없는 재외동포비자(F-4)를 받을 수 있다. 유효기간이 없고 3년 단위로 갱신만 하면 국내에서 계속 생활 가능한 장기체류비자다. 다만 고려인 누구나 재외동포 비자를 받는 건 아니다. 만 60세 이상만 가능하다. 옛 소련 지역 러시아를 제외한 ‘중앙아시아 11개국 출신’ 60세 이하 고려인은 재외동포비자를 받을 수 없다. 정부가 불법체류자가 많은 국가로 고시했기 때문이다.
11개국 출신 고려인이 재외동포로 인정받기 위해선 대학졸업자이거나 대한민국 공인 자격증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농사와 가게 점원 등 출신 고려인이 대부분이어서 재외동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60세 이하 고려인의 법적지위와 체류자격은 출입국관리법에 의해 정해진다. 사실상 외국인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 18세 이하는 방문동거비자(F1)로 입국 후 한국 학교 재학이 입증되면 재외동포비자를 받는다. 따라서 3세대가 함께 온 가족의 경우 조부모와 손자손녀는 재외동포로 인정받지만, 부모는 미인정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같은 가족임에도 나이와 학교 재학 유무에 따라 법적 지위가 달라지는 셈이다.
◇현실성 없는 취업 규정...불법 야기
법적지위는 곧 체류자격과 직결된다. 재외동포 인정을 받지 못한 고려인은 방문취업대상자가 된다. 국내체류 최장 기간은 4년 10개월이다. 처음 3년 기한 비자를 발급받은 뒤 1년 10개월을 한 차례 연장 가능하다. 이는 직장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단순노무직이나 일용직, 무직자의 경우 3년마다 출국해 방문취업비자를 다시 발급받아 입국해야 한다. 체류기한이 없는 재외동포비자를 받은 고려인과는 다르다.
비자 자격에 따라 취업 직종도 다르다. 방문취업비자 소지자는 주로 제조업, 농수축업, 간병인, 가사보조 등 단순노무직에서만 취업활동이 가능하다. 국내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도입된 제도다. 반면 재외동포비자는 공사장이나 식당, 유흥업소 일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인 육체노동을 요하는 업무’에는 종사할 수 없다. 2012년 도입 당시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됨에 따라 마련된 규정이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재외동포비자가 있더라도 상당수가 단순노무 외에 취업이 어려워 불법취업으로 내몰리는 실정이다. 방문취업비자 소지자와 같은 직종에 일하는 경우가 많다. 법은 비자 종류에 따라 취업직종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구분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재외동포비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재외동포라도 국적, 나이, 직업 등에 따라 법적 지위와 체류자격이 다른 게 현행 국내 재외동포 관련 법률이다.
특히 국적이 없는 고려인은 또다른 차별을 받는다. 지난 31일 현재 항공권 지원을 받아 광주에 온 고려인 중 30명 정도가 ‘무국적자’다. 이들은 1937년 옛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터전을 잡고 농사일을 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카자흐스탄 등 국가에서는 국적 회복 신청을 받았으나 많은 고려인들이 시골에 살았던 탓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권조차 없는 무국적자들은 임시(G-1)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왔으며, 취업 제한은 물론 6개월마다 자신이 살아오던 국가로 출국해 한 번씩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전쟁 상황을 고려해 6개월 이후에도 국내에 계속 체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전쟁 이후에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 무국적자로 입국한 고려인은 앞날이 더 불안할 수 밖에 없다.
무국적자인 김율랴(58세)씨는 “체류비자로 인한 두려움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행여 추방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또한 “국적은 물론 장기체류비자조차 받기 어려운 상황임을 알고 난 후 ‘하루 하루가 피를 말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 말한다.
◇건강보험료 체납자 증가세
현실과 괴리된 법률때문에 고려인들은 취업은 물론 교육과 보육, 의료 등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건강보험 문제가 대표적이다. 국내 체류 재외동포 및 외국인은 건강보험(지역가입자)는 체류 6개월 이상이 돼야 의무가입 대상이 된다. 직장가입자가 있는 경우 피부양자로 가족을 등록하면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단순 노무직이나 일용직의 경우 지역가입에 의존한다.
6개월 이상 체류해야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되기에 입국 후 6개월이 되기전에 다치게 되면 가족 모두가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월 우즈베키스탄에 온 38세 여성 고려인은 뇌수술을 받았지만, 치료비를 감담할 수 없어 결국 우즈벡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인은 3세대 이상이 한 가구를 이루는 경우가 많음에도 현행 건강보험 적용기준은 배우자 및 미성년자년 이외의 세대원(직계 존속)은 분리하도록 하고 있다. 같은 세대를 구성하는 성인 가구원들은 보험료를 중복해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국내 입국 후 6개월만에 건강보험 자격을 획득하더라도, 이전 기간까지 보험료를 한꺼번에 납부해야 한다. 이는 정부가 외국인 및 재외동포들의 ‘의료 먹튀’를 방지하고자 도입된 것으로, 오히려 장기체류를 원하는 고려인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법적 지위에 따른 취업활동도 안돼 가족 중 누군가 다치면 ‘산재보험’ 적용도 어렵다. 불법취업으로 내몰린 이들이 자발적으로 산재보험 적용을 꺼릴 수 밖에 없다. 자칫 강제 퇴거(추방)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사정에 보험료를 체납하는 고려인이 늘어나는 추세라는 게 고려인사회 활동가들의 전언이다. 보험료 체납 역시 자격 박탈 및 추방 대상이다. 아직까지는 건강보험료 체납에 따른 자격 박탈 및 추방 사례는 없지만 고려인사회 활동가들 사이에선 조만간 사회문제가 될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법률 개정도 제자리 걸음
이같은 문제점에 정치권에선 고려인 법적 지위 보장을 위해 여러 차례 법령 개정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20대 국회때 발의된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획득 및 정착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등 9개 법률안이 의원입법으로 발의됐음에도 모두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광주고려인마을’에 지역구를 둔 더불어민주당 이용빈 국회의원(광산구 갑)이 ‘고려인 등 무국적 재외동포 포용법’ 제정안과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고려인들 바람대로 될 지는 미지수다.
국내 고려인사회와 학자, 활동가들이 재외동포기본법 제정과 재외동포청 설립 등을 요구하며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현행 법률로는 권익증진과 안정적 정착을 위한 재외동포정책의 추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사회 등은 관련 법제를 개선하고 효율적인 정부 주도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제외동포 관련 사무를 전담하는 ‘재외동포청’을 신설하고, 각종 재외동포 관련 법과 특별법의 근간이 되는 기본원칙과 재외동포의 권익증진과 생활안정 및 기타 효율적인 재외동포정책을 통일되게 추진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재외동포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재외한인학회 회장인 임영언 조선대 교수는 “체류자체가 목적인 고려인들에게 재외동포비자는 유명무실하기에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으로 체류하기 위해 남은 것은 ‘영주권(F-5)’ 취득밖에 없다. 그런데 국내체류 고려인 대부분이 기본적 의사소통조차 어렵고 생활수준이 가구당 평균수입에도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주권 취득은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면서 “이는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아온 고려인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려인의 지위 향상은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논제이긴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고려인의 탄생 배경을 감안하면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재외동포로 인정받게 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