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8장 밤의 거리 (196회)

2022-12-18     남도일보

“무슨 용건이오?”

국제전화를 통해 로버트 타일러가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생이 기관에 끌려가서 된통 맞고, 억울하게 갇혔어요. 이러다 중형을 받을 것 같아요.”

“기관이라면 경찰서? 아니면 검찰?”

“그거라면 해볼 수 있지만, 그곳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KCIA?”

그가 단박에 알아차리고 물었다. 송안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 라는 암시였다.

“그런 일이라면 전화상으로 대화할 수 없소. 내가 사람을 보낼테니 그 사람한테 얘기하시오.”

“그래도 사안의 중대성으로 보아서 지금 윤곽이라도 말하고 싶은데요?”

“안되지. 내가 사람을 보낼테니 그 사람한테 얘기해요. 그러면 그가 나한테 비상전화를 할 거요.”

비상전화는 도·감청되더라도 암호로 처리되니까 전화 내용이 누설되지 않는다.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 전화를 한 며칠 후 주한 방산업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윌리엄 코호트가 찾아왔다.

“타일러 장군께서 찾아봬라고 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지요?”

송안나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결론삼아 당부했다.

“잡혀간 사람은 나의 집안 동생인데 서울서 출세했다는 누나가 그애 하나 빼주지 않느냐고 집안에서 난리랍니다. 지체장애 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청년이에요. 어렵게 가장노릇을 하고 있답니다.”

가장 역할을 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송안나는 그렇게 동정심을 유발하며 구명을 청했다. 이스트우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청년들이 대개 정의롭지요.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을 덜어주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면 젊은 청년으로써 훌륭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미스터 김에게 통고하겠습니다.”

“미스터 김이라니요?”

“스네이크 김이란 사람 모르세요? 한국말로는 독사라고도 하던데…”

그 말을 남기고 그들은 돌아갔다. 다음날 송안나에게 엉뚱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송안나인가를 확인한 뒤 그렇다 라고 답하자 잠시 후 누군가에게 전화를 연결해주었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김형욱이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이 직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송안나는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사람. 동베를린 사건, 임자도 간첩단 사건, 실미도 사건, 서울대학 뿌락치 사건 따위를 총지휘하고 일망타진한 반공의 화신. 송안나는 긴장을 숨기고 상냥한 말씨로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인사하게 되니 반갑습니다. 여기 화원에 부장님을 한번 모시고 싶은데 시간 나시겠어요?”

“하하하, 시간 나다마다. 로버트 타일러 장군을 모시는 분은 바로 애국자요. 그를 통해 월남전 특수를 누리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얼마나 큰 도움을 받습니까. 그런 사람을 가까이 모신 송 사장이 바로 애국자신데 안만나면 안되지요, 하하하.”

애국자.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말이었다. 그렇지. 그녀가 동두천, 의정부, 파주에서 미군을 상대로 하며 몸을 팔 때, 정부 인사들이 찾아와 “외화벌이를 한 당신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산업전사요, 진정한 애국자”라고 치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돈을 벌어도 그녀들은 가난했고, 병들었고, 성병이라도 걸리면 몽키하우스에 수용돼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페니실린 주사의 쇼크로 얼마나 양공주들이 죽어갔던가. 성병을 옮긴 미군 병사는 단속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성병이 옮아도 양공주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강제 수용하던 인권의 사각지대…

그런 가운데서도 보사부 파견관과 정부 사람들이 ‘애국자’라고 말하던 상황들. 몸이 망가지고 영혼마저 무너질 때도 그들은 그렇게 그녀들을 치케세웠다. 그런데 지금 이나라의 정보 수장도 애국자라고 칭송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