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8장 밤의 거리 (199회)

2022-12-21     남도일보

그런데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형욱 자신에 대한 원성이 여권 내에서 비등해지면서 그의 위치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그가 술을 먹다가 술주정인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이런 개새끼들이 날 못잡아먹어서 안달이 났어. 대통령 각하의 권력 기반을 다진 일등공신이 누구야? 그런데도 나를 이간질하고 쫓아내려고 발광들을 해? 내 가만 있을 줄 아나? 그 새끼들 내가 먼저 죽여버릴 거야.”

그의 감정은 복잡했고, 그래서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아니면 박정희는 벌써 몰락했을지 모른다. 그가 철저히 악역을 자처한 것은 사실이었다. 포악하고 잔인했지만, 그런 방법으로 박정희 권력을 뒷받침했다. 그는 파도처럼 넘쳐오는 저항을 그런 포악한 조치로 막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때, 그것이 그를 치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그 자신만이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추진이 본격화되자 차기를 노리던 김종필 계열이 먼저 반대했다. 김형욱은 간단없이 이들 세력을 제압했다. 정구영 전 총재를 비롯해 김용태,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김달수, 이만섭 등 공화당 간부들을 도청, 미행, 감시하며 협박했다. 김종필과는 파가 다르지만 3선 개헌에 반대하던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등 공화당 4인방도 가차없이 밟았다. 자신의 팔을 자르자 자연 김종필이 위축되고, 박정희가 직접 나서 그를 눌러앉히자 김종필은 결국 굴복했다. 그 일등공신이 김형욱이었다. 이들 반대파에 대한 전화 도청과 협박, 비리 폭로가 있었던 것이다.

김종필이 굴복했어도 심복이자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가 반발하자 국민복지회 사건에 연루시켜 그를 중정으로 잡아들여 고문으로 반 죽여놓았다. 언론에는 김용태의 국민복지회 부정만이 부각되었다.

김형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흥만, 연주흠, 성낙현 등 야당 국회의원 3명을 변절시켜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도록 이끌었다. 막대한 정치자금과 그들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끝내 개헌 찬성 대오에 합류시킨 것이다.

야당 원내총무인 김영삼을 요원들을 미행시켜 초산 테러를 감행했다. 본보기로 공포사회로 몰고 간 것이다다. 그 이외 야당 인사들을 금품과 물품을 살포하며 저항을 잠재우고, 불쾌하면 테러까지 감행하고 있었으니 나라는 경찰국가의 공포사회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강압적 휴교 조치로 맞섰다.

“이 모든 것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위해 내가 나선 것이오. 똥바가지를 쓴 것이란 말이다!”

박정희 일인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초석을 깔기 위해 그가 분투했다는 울분이었다.

“그런데 나를 친다고?”

생각할수록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는 그중 가장 잘한 치적을 대선 과정에서 야당 후보자 난립을 돕기 위해 금품 살포로 줄 세우고, 언론을 구워삶아 야당의 대립상만을 부각하는 보도가 나오도록 유도한 점을 들었다. 그것은 고도의 스킬이 요구되었다. 자칫하면 기밀이 새고, 또 다른 반발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미인계를 쓰고, 간통, 불륜까지 유도해 약점을 잡아두었다. 언론인들에게 속칭 쪼찡 기사를 쓰도록 술과 돈과 여자를 제공했다.

“나는 또 각하의 좌익 경력을 세탁해준 공로가 크단 말이야.”

박정희가 반공 노선을 걷도록 하고, 그렇게 해서 미국의 불신과 의심으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롭게 해준 공로 또한 크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선 과정에서 박정희가 반공 노선을 걸으며 전향을 확실히 해준 일등 공신이었다. 이렇게 모든 악역을 다 맡았는데, 이제 와서 토사구팽하려고 한다.

“송 마담, 이걸 미국에게 알려주시오. 헌데 미국도 잘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단 말이야. 내가 미국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힘을 쓴 줄 아시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몇 만의 월남 파병을 한 일등공신이 바로 나요. 이런 내 노력을 타일러 장군이 알아준다면 원이 없겠소. 안팎으로 덮쳐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