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8장 밤의 거리 (200회)

2022-12-22     남도일보

송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탁을 묵살하는 대신 엉뚱한 당부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보다 그녀가 갑의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미군 장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처럼 위상을 높여주는 것인가.

“송마담 타일러 장군에게 꼭 내가 한번 통화하고 싶다고 전해주시오.”

“그이는 은퇴했잖아요. 그런 분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아니오. 오히려 힘이 막강하지. 내 다 알고 있소.”

“그럴 게 아니라 대통령 각하를 직접 만나시지 그래요? 그분이라면 모든 게 해결되실 텐데요? 어르신을 위해 하신 일이니 모두 칭찬받으실 거예요.”

김형욱이 유독 작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따지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는 즉시 옆방으로 가더니 무전기로 경호실장을 불렀다. 그와는 사이가 좋았다. 필요에 의해 긴밀하게 상부상조하는 입장이었다.

“종규가? 나 남산 멧돼지다.”

“무슨 일이고?”

박종규가 뜨악하게 물었다. 근래 대통령이 그를 부르지 않아 그도 알게모르게 멀리하고 있었다. 5.16때 둘 다 주체세력으로 참여했으며, 이때 둘은 결속했다. 박종규는 육사 5기고, 김형욱은 육사 8기생이었다. 나이는 김형욱이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김형욱은 영관급이고, 박종규는 위관급이었다. 별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둘은 가깝게 지냈다. 둘 다 박정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김형욱은 밖에서 박정희를 보위했고, 박종규는 지근거리에서 박정희를 보좌했다.

박종규는 위관 시절 박정희·김종필과 육본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5·16의 핵심 멤버로 참가해 박정희 경호책임자로 발탁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과 함께 경호대장, 제3공화국 출범부터 대령 예편하여 청와대 경호실 차장을 거쳐 1964년부터 경호실장으로 승진했다.

박종규는 대통령경호실장직을 맡으면서 재산 축적을 많이 해 중정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독직과 부패에 물들려고 하지 않았지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인사 하나, 이권 하나에 돈이 박스째 들어왔다. 그것을 묵인한 사람이 김형욱이었다. 오히려 다른 정보기관이 비리를 캔 것을 대신 막아준 일이 잦았다. 박종규도 역시 이런 그를 고맙게 여기고 도왔다.

김형욱이 김재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되었을 때도 박종규의 힘이 작용했다. 김재춘이 군내 파벌 때문에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박정희는 장경순을 후임으로 발탁하려 했다. 이때 김종필과 박종규가 적극 천거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을 앉혔다.

김형욱은 정보부장 자리에 오르자 박정희가 차기를 노리는 김종필을 경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김종필을 온갖 음해와 모략으로 괴롭혔다. 박정희 뒤를 노리는 김종필은 제거 대상일 뿐 함께 갈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육사 8기 동기에다 직접 중앙정보부장으로 천거한 친구를 일격에 밟아버린 것이다. 그는 오직 박정희교의 행동대장일 뿐이었다.

중정을 악명높은 정보기관으로 만든 사람이 김형욱이다. 김종필이 창설하고 김재춘이 후임 부장이 되었으나 이들은 재임 기간이 짧아 정보기관으로서 체계화시키지 못한 데다 방향성과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하지 못해 좋은 뜻이건 나쁜 뜻이건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박정희 장기집권과 함께 김형욱이 중정 부장 10여년의 권력을 쌓아오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막강한 힘을 휘둘렀다. 그것은 박정희 장기집권에 거슬리는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척결해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권력을 강화하는 정권 보위의 전위대로서만이 기능하는 것 같았다.

그는 대기업의 밀수와 불법 외환거래, 불법 상거래를 포착해 어마어마한 통치자금을 조달했다. 이런 자금과 공권력을 동원해 박정희 재선, 3선, 영구집권을 노리는 데 사용했다. 또 야당 파괴공작으로 폭력배들을 동원해 당대회를 무산시켰으며, 야당을 분열시키는 정치공작을 진행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불법적인 도청·감시·납치·체포·고문 등 민주화세력과 박정희 비판 세력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이 모든 행위들은 박정희 장기집권을 위한 플랜의 ABC였다. (이상 위키백과 일부 인용)

“종규, 각하를 만나게 해줘. 꼭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