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연재소설 ‘붉은 파도’…제9장 제거 (203회)

2022-12-28     남도일보

들이당창 독한 깡술을 먹었으니 김형욱이 급격하게 취기가 올라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목덜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행동은 인사불성이었다.

“부장님, 그렇게 마시면 몸 버려요.”

“이까짓 몸? 이미 버린 몸이야. 버려도 좋아. 대신 몇 놈 기어이 손볼 거야!”

그의 입장에서 자신을 모함하고 음해한 사람들은 여럿이었다. 헤아려 보니 맨먼저 대구 출신 이만섭이 눈에 밟혔다. 국회의원이랍시고 건방떨길래 잡아다가 몇방 갈겨주었다. 그에게 당했던 JP계열이 있었고, 전 부장 김재춘도 독을 품고 있었다. 재야 인사들은 거기에 비하면 불쌍한 것들이었다. 이만섭은 어느날 박정희를 독대한 자리에서 시중 여론을 전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각하, 정보부장의 권력이 도가 지나칩니다. 사람들을 심하게 다치게 하니 그 욕이 모두 각하에게 돌아갑니다.”

“이 사람아, 열심히 일하는 사람 모략하면 안돼.”

박정희는 이만섭을 꾸짖었다. 그러면서 그 사실을 김형욱에게 슬쩍 귀띔해주었다. 김형욱이 씨근벌떡이며 이만섭을 잡아다가 엔간히 조져버렸다. 그렇다고 이만섭이 만만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악바리가 되어 대통령을 다시 찾아갔다.

“각하.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자고로 로마의 시저도 오른팔에게 죽었고, 무솔리니도 자국 군대 장교에게 당했습니다. 김좌진 장군도 부하의 총에 살해됐습니다. 같은 반공 노선을 걸었던 김구 선생도 이승만 박사의 졸개 장교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각하, 김형욱이가 두렵지 않습니까? 지금 그자가 기고만장해 있습니다. 지가 통치권자나 되는 듯이 껍적대고 있습니다. 지금 손보지 않으면 각하가 다칠 수 있습니다. 민심도 사나워서 그 해악이 각하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외부의 적은 병사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통치자를 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내부의 적이 통치자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각하, 로마 철학자 시세로도 강한 제국은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으나 내부에 기생하는 배신자에게 무너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헛소리 말고 돌아가.”

사실은 맞는 말이다. 외부의 적은 색상이 다른 깃발로 무장하여 쉽게 식별이 가능하지만, 내부의 적은 위장과 사술의 기술자들이어서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골목골목 으슥한 곳을 누비며 흉계를 꾸민다. 내부의 적은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되려 당할 수 있다. 독버섯은 미리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통치술이다. 어떤 놈도 믿을 수 없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박정희는 김형욱의 교만, 포악성, 특유의 도발성을 경계하고, 민심의 이반을 이유로 갑자기 그를 쳐버렸다. 자신의 도덕적 타락을 가장 많이 알고 있으니 어느 순간, 옷을 벗기고, 일거수일투족을 미행 감시해야 한다. 놔두면 놔둘수록 자신의 약점을 고리로 주제넘는 딜을 꾀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김형욱은 송안나 마담 앞에서 내놓고 박정희의 흠을 잡았다.

“송 마담, 지가 무슨 의자왕이고 연산군이라고 조선팔도의 쓸만한 여자들을 다 불러들여서 농락했어. 내 조직에 그 전담 부서가 있었지.”

그때 정봉필 영업부장이 양주를 새로 가지고 나오면서 슬쩍 송안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김형욱 부장, 오늘 모가지 나갔습니다. 그 울분을 못이기고 여기서 술주정을 하는데 밖에까지 다 들리니 단도리 하십시오.”

송안나가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욱이 싸늘한 눈초리로 정봉필을 노려보았다. 너 무슨 첩자 아니냐는 시선이었다.

“자네는 나가 있어!”

정봉필이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김형욱이 다시 술주정을 하였다.

“송 마담, 박정희가 빨갱이 원조라는 것 몰리나? 미국도 그 내막을 다 알고 있었지. 일제때부터 좌익 사상에 물들었고, 해방 공간에서는 남로당 군사부 총책으로 있었다 아이가. 쫓기다가 체포되니까니 그를 따르는 일본 육사 출신 후배들을 밀고한 대가로 목숨을 구한 더러운 새끼야. 말하자면 자기 목숨 하나 구걸하려고 후배들을 죽인 배신의 아이콘이란 말이다. 그런 자를 내가 미국 정보통과 교류하면서 사상 세탁을 해준 기라. 그런데 나를 배신해?” <계속>